현장설명회

尙州 伏龍洞遺蹟 發掘調査 상주 복룡동유적 발굴조사

시대 청동기, 통일신라, 조선시대
성격 주거지, 건물지
회수 12
개최일자 2004.02.27
조회수 2,103
Ⅰ. 調査槪要

1. 유적 위치 : 경북 상주시 복룡동 256번지 일원
2. 조사 기간 : 2003. 6. 16 ∼ 2004. 8. 18
3. 조사 면적 : 31,312㎡
4. 조사 기관 : (財)嶺南文化財硏究院(원장:李白圭)
5. 조사의뢰기관 : 대한주택공사 대구·경북지역본부


Ⅱ. 遺蹟의 立地와 環境

유적이 위치한 상주는 지리적으로 영남의 서북부지역에 위치하며, 북서쪽으로 백두대간을 경계로 이화령을 통해 옥천·보은·영동 등 금강수계권으로 연결되고, 상주시 화북면의 눌재를 통해 괴산·충주 등의 남한강 수계권과 통교할 수 있는 분수령상에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의 수계를 따라 내륙으로는 안동·봉화까지 이를 수 있으며, 남부지역으로는 김해·부산까지 나아갈 수 있는 수륙교통의 요지에 위치한다.
상주는 낙동강의 상류에 위치하며, 낙동강에 합류하는 많은 지류에는 넓은 평야와 얕은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지리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상주는 역사적으로 『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沙伐國이 있었는데, 3세기 후반에는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524년(법흥왕11년)에는 上州가 설치되고 군주가 파견되었다. 또 557년(진흥왕 18년)에는 上洛郡이 되었고, 687년(신문왕 7년)에 九州制度가 시행되면서 沙伐州로 환원되었다. 그 후 尙州(경덕왕 16년, 757)-沙伐州(혜공왕 12년, 776) 등으로 지명이 바뀌었다가 고려 태조때에 다시 尙州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성종대에 상주목이 설치되었다. 조선 태종때에는 경상도 감영을 상주목에 두어 영남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세조때에는 鎭을 설치하여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조사대상지역이 위치한 곳은 상주시가지의 북동편 외곽(상주읍성지의 동문에서 북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짐.)으로 북천과 병성천이 합류하는 삼각지점의 안쪽에 위치한 비옥한 복룡동의 넓은 평야지대의 중앙부에 해당된다. 대부분이 논으로 경작되고 있었으며, 유적의 남쪽 일부만 테니스장으로 이용되었다. 남동쪽에는 병성천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는 북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상주시가의 북동편에서 합류하여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조사대상지역의 주변유적으로는 남서편의 상주시내에는 상주읍성지, 상주향청 등이 위치하고 있고, 동편으로는 복룡동 당간지주와 조공제 등이 남아있으며, 그 동편으로 우뚝 솟은 병풍산자락에는 병성동·헌신동고분군, 성동리고분군, 외답리고분군과 병풍산성이 조영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조사대상지역이 위치한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調査內容

1. 調査經過
조사대상지역은 대한주택공사 대구·경북지역본부에서 추진하는 상주 복룡2지구 주택건설 사업지구로서 우리 연구원에서 사전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지표조사 결과(영남문화재연구원, 2001) 유물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2002년 11월 20일부터 12월 21일까지 우리 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시굴조사 결과 적심건물지, 우물, 수혈유구, 구상유구 등 조선시대 생활유적이 전면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는 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연구원에서 2003년 6월 16일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2. 調査方法
조사방법은 조사대상지역 전체를 도북방향으로 중심축을 설정하여 30 30m 단위의 Grid를 설치하였고, 유적의 가운데 부분에 남-북, 동-서방향으로 폭 6m의 중심둑을 설치하였다. 각 그리드의 명칭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A∼D순, 북쪽에서 남쪽으로 1∼6순으로 A1, A2, B1, B2…등의 번호를 부여하였다. 유구의 전면노출을 위하여 조사구역범위내 가장자리에 설정한 Trench와 시굴조사 Trench를 정리하여 전체 지형상에서의 유구형성층위 및 전체 토층양상을 파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상부 퇴적토는 전면적으로 제토하였고, 하부 유구 및 각 건물지의 층위를 파악하기 위해 소규모 Trench 조사도 병행하였다. 내부조사에서 건물지는 건물구조의 근간이 되는 초석 및 적심석을 파악하여 규모, 석재, 평단면 형태, 숫자, 수혈여부와 굴광형태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적심석의 상·하 중복 및 적심석의 위치관계를 확인하여 건물전체의 구조 및 배치형태, 규모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우물은 규모(직경, 깊이), 위치, 기수, 축조방식, 평·단면형태, 출토유물, 상부시설 및 바닥시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수혈유구는 토층관찰을 토대로 층위별로 파내려가는 수평층위 제토를 원칙으로 하였다. 각 단계별로 기구를 이용한 직상방촬영 및 다양한 각도에서의 촬영을 실시하였다. 내부조사가 완료되면 유구실측, 유물수습을 하였고 유물수습시에는 고유번호를 부여하여 수습작업을 진행한 후 유물목록을 작성하였다. 개별유구의 조사가 완료된 이후에는 유구종합기록지와 유구배치도를 작성하였다. 한편, 현장발굴조사와 병행하여 인접 주민들의 전언 등 탐문조사와 함께 문헌조사를 실시하였다.

3. 調査內容
유적의 전체적인 층위는 동-서방향의 5Grid를 기점으로 기반토 및 토층의 변화가 관찰된다. 북쪽은 경작층 아래에 점성이 강한 황갈색사질점토층(경작층에서 30∼40㎝ 아래), 그 아래에는 명황갈색사질점토층이 확인되었고, 남쪽은 복토층과 경작층 아래에 모래와 자갈이 포함된 어두운 황갈색사질점토 및 갈색사질점토층(경작층에서 20∼30㎝ 아래), 그 아래에서 모래층 및 흑갈색점토층이 확인된다. 유구는 경작층과 복토층 아래의 황갈색사질점토층 및 갈색사질점토층에서 확인되었다. 남쪽의 일부 지역은 하천의 유수에 의하여 유구의 일부가 유실된 것으로 보이며, 유구들이 조사구역 밖으로까지 계속 연장되고 있다. 현재 동-서방향의 1·2Grid는 유구확인 작업 중에 있으며, 3Grid 남쪽으로는 내부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현재
까지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4동, 통일신라∼조선시대 건물지 22동, 소형 연못 1기, 우물 38기, 수혈유구 169기, 구상유구 16기, 기타 64기 등 총 314기이다.

가. 遺構

1) 靑銅器時代 住居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4동이 조사되었다. 하천의 범람에 의한 기반층의 훼손이 적은 B3·4Grid 부분에 분포하고 있고, 4동 모두 후대 유구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주변에 후대의 많은 유구들이 산재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당시에는 지금보다 많은 수의 주거지가 분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주거지는 표토층 아래의 기반층인 황갈색사질점토층에서 확인되었으며, 내부퇴적토는 암갈색사질점토이다. 주거지 바닥과 매몰토에서 목탄이 극소량이 확인되었는데, 매몰토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의 노출양상으로 볼 때, 주거지의 폐기원인은 自然的인 廢棄로 보여진다.
B3G-1·2호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원형으로 내부에 노지와 가운데 수혈이 없고 양주혈만 갖춘 이른바 송국리형 주거지이다. 양주혈끼리 연결하는 일직선은 북서-남동방향이며, 주혈
은 폭 22∼26㎝, 깊이 8∼10㎝이다. 유물은 B3G-2호 주거지의 바닥에서 무문토기저부 1점이 출토되었다.
B3G-3호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세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동-서방향이다. 내부에서는 주혈 2개와 노지 1개가 확인되었다. 주혈은 폭 18㎝, 깊이 8㎝ 정도로 동-서방향의 가운데 중심축선으로 나란하게 위치한다. 주혈간의 거리는 260㎝이고, 양단벽면에서 양주혈간의 거리는 260∼280㎝이다. 노지는 서쪽에 위치한 주혈과 서단벽면의 사이 중앙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원형이고, 규모는 지름 40㎝정도로 소토와 목탄이 깔려 있었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B4G-1호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장방형으로 장축방향은 동-서방향이다. 내부에서는 수혈 2개가 확인되었다. 평면형태는 타원형에 가까우며, 규모는 길이 40∼52㎝, 너비 32∼36㎝, 깊이 4㎝ 정도로 동, 서쪽에 각각 나란하게 위치한다. 양수혈끼리 연결하는 일직선은 장축방향과 동일하며, 내부토는 소토와 목탄이 포함된 암갈색사질점토이다. 유물은 무문토기저부 3점, 홍도 1점, 석부 1점, 석착 1점이 출토되었다.
2) 建物址
건물지는 22동이 조사되었다. 주위에 연결이 안되는 적심석들이 흩어져 있어 또 다른 건물지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서로 중복관계를 가지며 폐기와 건립이 반복으로 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지는 경작층을 제거하자 적심석이 확인되었는데, 근대 경작지의 활용을 위해 구지표면을 어느정도 삭평한 후 복토되었기 때문에 건물지와 관련된 기단석렬이나 기타 내부시설은 확인되지 않고 적심석만 확인되었다. 적심석의 경우 하단부는 소형의 할석을 이용하고 있으며, 소형 할석 위에 비교적 큰 할석으로 쌓고 있다. 각 건물지에서 조사된 적심석은 전체적으로 원형의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하부 기반층의 차이에 따라 그 깊이도 차이가 있다.
이들 건물지는 규모 및 중심축선에 있어서 서로 차이를 보이며, 크게 두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건물지군의 중심축이 정남향으로 위치하고 적심석의 잔존 직경이 180∼220㎝, 깊이 40∼50㎝ 내외이다. 또 하나는 건물지군의 중심축이 정남향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위치하고 있고, 적심석의 잔존 직경이 70∼110㎝, 깊이 20∼30㎝ 내외이다. 특히 B3·4Grid에 위
치한 중심축이 정남향인 건물지의 경우 몇 동의 건물이 하나의 단위공간을 구성하며 군집배치 되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물자료를 통해 건물지의 건립연대·존속기간을 살펴보면, 상층에서는 조선시대의 타날판의 크기가 장판인 창해파문, 집선문 암·수키와와 분청자, 백자가 주로 수습되었으나 하층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도기 및 타날판의 크기가 중판인 선조문 암·수키와, 고려시대에 널리 사용된 귀목문 암막새를 비롯해 타날판의 크기가 장판인 우상문, 복합문 암·수키와, 청자가 주로 출토되었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은 건물지 내외의 수혈유구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고려∼조선시대에 걸친 건물지로 추정된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수혈유구(주거지)가 폐기되고, 그 터를 이용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건물이 여러차례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3) 우물
우물은 38기가 조사되었다. 모두 석조우물이며, 다양한 구조의 것이 조사되고 있다. 현재 조사가 진행중인 것이 많아 확실치 않으나,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규모에 있어서 상부의 내경이 50∼116㎝로 대소의 차이가 있고, 잔존깊이도 얕은 것이 38㎝, 깊은 것은 180㎝에 미치는 등 차이가 심하다. 평면형태는 원형, 방형, 장방형, 타원형 등 다양하게 나타나며, 단면의 형태는 통형, 상광하협형 등이 확인된다. 측벽은 정연하게 잘 쌓았으며, 최하단에 판재나 통재로 결구를 한 것도 확인된다. 우물내부의 매몰토는 상부토와 하부토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일시적으로 메워지거나 메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물들이 모여 있는 것도 많아 차후 그 용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출토유물은 우물 내부에서 고려∼조선시대의 도기편, 기와편, 자기편, 목기, 동물유체 등이 검출되었다.

4) 竪穴遺構
수혈유구는 169기가 조사되었다. 이들의 용도에 대해서는 크게 몇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① 주거용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유구의 평면형태가 대체로 정형하며, 바닥면은 편평하고, 내부에는 부뚜막이나 노지와 같은 시설이 있다. 주거용 수혈도 시대에 따라 몇 가지 형태로 나뉜다.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A3G-15호, B3G-6호, B4G-7호의 경우로 평면형태가 말각방형이며, 바닥면이 고르고, 내부에는 L자형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다. B6G-1호의 경우는 평면형태가 부정형이며, 한쪽 가장자리에 부뚜막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A3G-12호의 경우 가장자리에 기둥받침석으로 판단되는 석재가 놓여져 있고, C3G-11호, D3G-5호, D4G-4호의 경우 기둥구멍이 확인되는데 구멍안에 보강석이 있다.

② 작업장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유구의 평면형태가 원형이나 타원형이며, 다량의 소토나 숯과 같은 것이 확인되고 바닥과 벽면이 소결되었다. 삼 등을 제작하는 시설의 하나로 판단된다. 이러한 유구의 대표적인 예로는 B6G-9호, C5G-1호, D4G-10호, D6G-10호 이다. 또한 평면형태가 장타원인 가마도 확인되었는데 B3G-1호, B3G-2호, D3G-1호가 그것이다.

③ 저장시설로 사용되었을 경우
유구의 평면형태는 원형이나 타원형이며, 다량의 생활유물이 출토되거나 대호가 매납되어 있다. 물건이나 식량을 저장하는 시설의 하나로 판단된다. 이러한 유구의 예로는 C4G-11호, D3G-11호가 있다.

④ 폐기장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유구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부정형이며, 내부에는 생활유물과 대소의 천·할석들이 무질서하게 채워져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유구의 예로는 A3G-4호, A4G-5호, B4G-5호, B5G-4호, B5G-6호가 있다.

⑤ 토취장으로 사용되었을 경우
유구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부정형이며, 바닥은 중복된 것처럼 고르지 않다. 주로 건물지의 내외면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내부퇴적토는 주변의 흙과 유사한 성분이다. 이러한 유구의 예로는 A4G-1호·A5G-1호·A5G-2호·B4G-2호 건물지 주변에 위치한 수혈들이다.

나. 出土遺物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물자료는 현재까지 토·도류 397점, 와·전류 516점, 자기류 524점, 기타 53점 등 총 1,490점이 출토되었다.

1) 청동기시대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청동기시대 유물은 지표수습된 유물을 포함하여 토기 5점, 석기 3점 등 총 8점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살펴보면 토기는 무문토기 발과 호가 있으며, 파수가 달린 홍도가 있고, 석기는 석촉, 석부, 석착 등이 있다.

2) 통일신라∼조선시대
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된 유물자료는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확인된다. 현재까지 도기류 392점, 와·전류 516점, 자기류 524점, 기타 50점 등 총 1,482점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종류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도기류
도기류는 인화문도기와 완류가 소량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구연부, 동체부, 저부등 파편의 상태로 출토되었다. 인화문이 시문된 도기는 뚜껑과 완, 대부완, 덧줄무늬병편이 출토되었는데 점열문이 시문된 것이 많다. 인화문에서 7세기에 유행한 수적형문이 나타나지 않는 점과 9∼10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덧줄무늬병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일단 8세기 이후로 판단된다. 고려∼조선시대의 것으로 판단되는 도기들의 기종은 병, 동이, 옹, 호, 시루, 장군 등이 있다. 회청색경질토기가 대부분이며 일부 회백색·회색 연질토기들이 확인된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연부와 저부편들은 대형호나 동이 등의 편으로 추정되지만 극히 일부만 남아있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동체부의 외면에 타날된 문양은 경부에 파상문이 시문된 것이 일부 있으며, 대부분이 격자문이고, 내면은 격자문, 불규칙선문이 주류를 이룬다.

② 와·전류
와·전류는 암·수키와를 비롯하여 약간의 막새와 명문기와 및 전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암·수키와는 표면에 타흔된 고판문양은 무문, 선조문, 횡선문, 격자문, 승석문, 우상문, 변형우상문, 복합문, 창해파문, 집선문 등 10여 가지의 시문단위로 구분된다. 수키와는 언강이라는 段과 미구가 없는 무단식은 무문이나 선조문이 주류를 이루며, 타날판 크기는 중판과 장판이 확인된다. 유단식은 창해파문이나 집선문이 주류를 이루며, 타날판 크기는 장판이 확인된다. 이면에는 천을 이었던 흔적이나 포목흔적, 그리고 점토판의 재단흔적이나 연접흔적 등이 남아 있는데, 특히 점토판을 점토뭉치에서 실이나 철사줄로 자를 때 생기는 재단흔적이 있는 예는 선조문이나 우상문 등이 타흔된 고려시대 기와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분할도흔은 기와의 내측에서 넣어진 것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고판문양이나 제작방법상에서 시대적인 차이가 보인다. 막새는 고려시대에 널리 사용된 귀목문 암막새가 출토된다. 명문기와는 승석문 암키와에 官자가 찍힌 기와를 비롯하여 새 모양이 음각된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 방형전, 용두와편 및 용도미상의 와제품이 출토되었다.

③ 자기류
자기류는 청자, 분청자, 백자, 명문자기 등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청자는 소량이 출토되었는데 크게 무문청자, 음양각청자, 녹청자로 구분된다. 기형은 대접, 화형접시, 잔 등으로 음양각청자의 문양은 연판문이다. 분청자는 대부분 일상 생활용기인 대접과 접시, 종지로 이외에 소량의 병과 호편이 확인되고 있다. 시문기법은 상감, 인화, 철화, 귀얄기법 등이 있으며, 14세기말로 추정되는 태토 빚음 분청자에서 15세기대의 인화분청자, 15세기 후반 이후의 철화, 귀얄분청까지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백자는 무문의 순백자들로 대부분 일상 생활용기인 대접과 접시, 종지, 잔 등이 확인된다. 16세기대의 역삼각형 굽(전기백자)과 17∼18세기초의 오목형 굽(중기백자)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 굽들은 세부 형식에서 차이가 있으나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들이다. 명문자기류는 연당초문이 시문된 분청자의 바닥중앙에 司膳(司膳暑:왕의 식사를 맡아보던 관청으로서 1362년 고려의 尙食局이 司膳暑로 되어 조선으로 이어진다.)이란 관사명을 흑상감한 것과 인화기법으로 시문된 분청자의 바닥중앙에 官자를 새기고 백토분장한 것, 福, 天, 三月, 十등이 쓰여진 묵서명 백자 등이 있다.

④ 기타
금속기로 동전과 장신구가 있다. 동전은 지표수습된 崇寧通寶(1102∼1106년)와 元豊通寶(1078년)가 있고, 장신구는 동곳이 있다. 석제품으로는 납석제 뚜껑과 沙伐州……沓里…… 등이 새겨진 용도미상 석제품이 있다. 이 밖에 어망추, 방추차 등의 토제품이 출토되었다.

Ⅳ. 調査成果 및 意義

1. 상주지역에서 처음 발굴조사 된 대규모의 취락유적으로 청동기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유구들이 동일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조영되고 있음이 확인됨으로써 향후 이 지역의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기초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2. 상주지역에서 처음 발굴조사 된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대구·경산의 영남내륙지역과 충주를 비롯한 충청도지역과의 문화상의 연관성이나 연속성을 비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송국리형 주거지가 낙동강 상류지역에서도 확인됨에 따라 청동기시대 문화상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이며, 그 전파경로에 대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3. 복룡동유적의 적심건물지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동일지역에 지속적으로 폐기와 건립이 반복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판단되며, 그 당시 사람들의 주거 공간의 분할과 규모, 대소 가옥의 차이 등 지방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복룡동유적이 상주읍성지의 북동편 외곽에 위치하며, 우물과 다양한 기능의 수혈유구들이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의 서민 생활상을 복원·연구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4. 복룡동유적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유구들과 함께 다양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그 변화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뿐만아니라 이를 통해서 이 지역 정주인의 사회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적 전경
A3-A6, B3-B6 Grid 전경
B3,4 Grid 전경
B3 Grid 주거지 1호
B3Grid 수혈 6호
B5 Grid 수혈 6호
B6 Grid 수혈 1호
B6 Grid 수혈 1호 출토유물
각종 도기류
연당초문 ‘司膳’ 銘 분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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