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설명회

蔚山 農所 倉坪洞遺蹟 發掘調査 울산 농소 창평동유적 발굴조사

시대 삼국(신라)
성격 고분
회수 4
개최일자 2001.01
조회수 1,819
울산 농소 운동장부지내 蔚山 農所 倉坪洞遺蹟 發掘調査

Ⅰ. 調査槪要

가. 유적위치 : 울산광역시 북구 창평동 1071번지 일원

나. 조사기간 : 2000년 9월 27일~2001년 3월 25일(예정)

다. 조사범위 : 201,600㎡

라. 조사기관 : (재)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 : 李白圭)


Ⅱ. 調査經過

울산광역시 북구 창평동 1071번지 일대의 농소운동장부지 조성사업과 관련하여 울산광역시 북구청의 의뢰로 2001년 1월에 형질변경지역 1만평에 대한 지표조사가 본 연구원에
의해 실시된 바 있다. 지표조사에서 도질토기편과 지석 등이 수습됨에 따라 당해 4월 6일~6월 4일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성격이 명확하지 않은 구상유구, 수혈유구, 그리고 다수의 주혈을 확인하였다. 발굴조사는 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00년 9월 27일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조사대상지역은 최근의 경지정리 과정에서 삭평이 많이 되었지만 청동기시대 주거지 13동을 비롯한 다수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특히 시굴조사시 성격이 불분명하였던 주혈군과 구상유구가 서로 연결되면서 목책시설을 갖춘 대형의 구조물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구의 현황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13동, 굴립주건물지로 파악되는 구상유구 5동, 수로시설 5개소, 야외 노지1개소, 성격을 알 수 없는 구상유구 5기가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목책관련 구 8기, 목주열 9기, 수혈유구 100기, 토기매납유구 4기, 굴립주건물지 6동, 우물(집수구) 2기가 있으며, 조선시대의 주거지 2동과 구상유구 2기, 우물 1기 등 총 163기의 유구가 확인되고 있다.


Ⅲ. 遺蹟의 立地 및 考古學的 環境

조사지역은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 북구 창평동 1071번지 일대이며, 평지와 접하는 구릉 상에 위치한다. 유적이 위치하는 구릉은 해발 20~37m이며, 가운데 부분이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조사지역 주변의 지세를 살펴보면, 동쪽으로는 삼태봉-동대산-동화산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준령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나 있고, 서편인 유적의 전방부에는 태화강의 지류인 동천강과 동천강을 따라 형성된 넓은 충적지대가 펼쳐져 있다. 조사지역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는 저지성의 소구릉이 위치한다. 이러한 지세상의 특성은 조사지역이 울산만과 경주로 연결되어 있는 울산-경주간 구조곡 지형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동천강을 따라 형성된 넓은 충적지대와 울산만과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조사지역 주변에는 선사시대유적을 비롯한 역사시대의 유적이 다수 분포한다. 앞서 발굴조사 된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으로는 호계리유적(직선거리 500m/경남대박물관 조사)과연암동유적(직선거리 4㎞/울산대박물관 조사)이 위치한다. 또한 지표조사를 통해 동천강 양안을 따라 많은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삼한․삼국․통일신라시대에는 사로국의 성장과 신라․통일신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주변에는 많은 유적이 분포한다. 영남지역의 주요 철산지인 달천광산(직선거리 3㎞), 경주와 울산만을 연결하는 교통․방어적 중요성, 동천양안에 발달된 충적지 등의 지리적 요인은 이러한 유적의 분포에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먼저, 유적의 북으로는 경주와 울산의 경계에 신라왕경의 동남쪽 외곽 방어선인 관문성(직선거리 5㎞)과 신대리성(직선거리 7㎞)이 위치한다. 그리고 관문성 바로 이남에는 삼한․삼국시대의 분묘유적인 중산동유적(직선거리 4㎞/창원대박물관 조사)이 위치한다. 유적의 서편과 남쪽 울산만부근에는 영남의 주요 철산지인 달천광산과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성곽이 분포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성곽으로는 반구동 토성, 화산리 토성이 있고 조선시대 성곽으로는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마지막 결전장인 학성과 경상좌도 병영이 있었던 병영성이 위치한다.


Ⅳ. 調査內容

1. 遺構

1) 청동기시대
① 주거지
본 유적에서는 현재까지 13동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조사대상지의 외곽을 따라가며 분포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시굴조사에서 예상했던 것처럼 경지정리과정에서 능선의 중앙부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주거지는 황갈색사질점토층이 확인되는 층과 기반층의 훼손이 적은 부분에 산재하고 있어 당시에는 지금보다 많은 수의 주거지가 분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평면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장방형인 것 중 5호주거지의 규모가 820×484×22㎝로 가장 크며, 4호 주거지의 규모가 370×210×5㎝로 가장 작다. 방형은 1호 주거지가 해당되며, 규모는 516×490×7㎝이다.
구조는 주혈의 배치에 따라 8주식, 6주식, 4주식으로 확인되며, 장방형의 경우에는 소형의 주거지는 4주식, 중형이상의 주거지는 6주식, 8주식이다. 방형의 주거지는 4주식이 기본이다. 내부시설로는 4호, 9호 주거지를 제외한 모든 주거지에서 벽구가 확인되는데 내부의 벽면을 따라 ‘ㄷ’자 또는 ‘ㅁ’자상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벽구 내부에 주혈이 있는 예와 없는 예로 구별된다. 후자의 예로 7호 주거지와 8호 주거지가 해당된다. 벽구의 폭은 20㎝
전후, 깊이 5㎝ 전후이며, 단면형태는 ‘U자상이다. 노지는 모두 토광형의 무시설식 노지로 주거지 내부에 1개의 노지가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형의 장방형주거지로 분류되는 3호주거지와 5호주거지에는 각각 2개와 3개의 노지가 확인된다. 상면은 별다른 시설 없이 생토면을 평탄하게 사용한 예가 일반적이나, 1호, 9호 주거지는 중앙에 불다짐 처리하여 상면을 사용하였다. 1호, 3호, 10호, 11호, 12호 주거지의 경우 주거지 바깥에 돌출되는 외구가 확인되는데, 왜구의 바닥 높이가 주거지의 상면의 높이 보다 높은 구조로 되어 있어 향후 그 성격이 주목된다. 중복은 6호 주거지와 7호 주거지, 8호 주거지와 굴립주 1호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시기적인 차이를 알 수 있는 명확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구별하기는 힘들다. 화재로 인해 폐기된 경우는 6호 주거지뿐이며, 대부분 마을의 이동 등으로 인해 폐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의 이동으로 인한 주거지의 폐기는 자연 그대로 퇴적이 이루어진 예와 폐기 당시 인위적으로 주거지 내부에 적석의 행위가 이루어진 예로 대별되는데, 후자의 경우는 5호, 9호, 10호, 11호, 12호 주거지가 해당된다.
② 구상유구
청동기시대의 유구로 파악되는 구상유구는 평면형태가 ‘ㅡ’ 자형, ‘ㄱ 자형, ’ㄷ‘ 자형, 부정형으로 나타난다. 대부분 단면형태는 ’U 자형을 하고 있으며, 내부에 무문토기편 지석,
석촉 등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ㄱ’ 자형, ‘ㄷ’ 자형의 구상유구는 구로 감싸는 내부에 주혈이 확인됨으로 굴립주건물, 즉 창고 시설일 가능성이 있다. 굴립주건물이라 판단되는 구상유구는 5기가 확인되며, 이중 1기를 제외하면 모두 유적의 서편에 집중하는 분포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③ 수로
수로는 조사구역의 남쪽에 위치하며, 이 지역은 곡부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5기의 수로가 확인되며, 이 중 수로1이 가장 크며, 곡부의 진행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나머지 4기의 수로는 수로1의 북편에서 수로1과 직교하여 합류하도록 설치되어 있다. 수로1이 主水路로 생각되며, 현재 확인되는 길이는 123m이다. 수로1의 상면 폭은 40~250m로서 일정하지 않다. 최대깊이는 60㎝이며, 단면형태는 ‘U 자형, ’Y‘ 자형이다. 수로 2, 3, 4, 5는 16~20m정도 확인되며, 폭은 150㎝ 전후이다. 잔존 깊이는 20~30㎝ 내외이다. 수로 내부에는 다수의 무문토기편과 박편이 출토되었다.
④ 야외노지
10호주거지와 11호주거지 사이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이며, 내부에 목탄과 소토가 채워져 있다. 규모는 260×230×20㎝(길이×너비×깊이)이다. 바닥에는 방형의 석재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으며, 무문토기발 완형이 1점 출토되었다.

2)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유구는 목책과 목주열 같은 구획․방어시설과 이러한 목책과 목주열 내부에 존재하는 수혈유구, 고상가옥, 주혈군 등의 내부 관련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① 木柵․木住列
전체적인 배치형태를 살펴보면, 木柵․木住列의 전체적인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조사지역의 중앙과 서쪽에 집중 분포한다. 규모는 동서 190m 남북 70m 규모로서, 내부 공간의면적은 약 4,000여평이다. 이러한 장방형 목책․목주열은 바깥부분인 목책의 경우 이중 또는 삼중으로 매우 견고하게 설치하였다. 다시 그 외곽에는 방형의 목주열을 감싸는 2열의 목책이 조사대상지 북쪽에서 확인되었다. 즉 1차적인 방형의 목책․목주열이 있고, 다시 이를 보호하는 외곽의 목책이 있는 배치 형태이다. 또한 구릉의 정선부와 사면부가 접하는
부분을 따라 설치되어 있어 가장 입지가 좋은 구릉의 평탄면을 내부의 주공간으로 이용하려는 의도성도 엿보인다. 중복 또는 증․개축에 관련한 문제에 있어, 현재 유적의 잔존상태로 볼 때 다소 불명확하지만, 목책․목주열과 내부 관련시설에서 출토된 유물들 상호간에 시기차이가 없고 목책열과 목주열의 일정한 정형성과 기획성이 있는 점으로 보아 동시기에 축조된 유구라고 판단된다. 그 예로 목책열 1과 4, 5 사이의 관계는 다소간 선후 관계는 인정되지만 내부유물이나 내부구조에서 별 차이가 없다. 이는 목책열1을 축조한 후 목책열4, 5를 덧대어 축조한 결과로 선후 관계는 있겠지만 거의 동시기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목책과 목주열의 기능은 차이가 있겠지만 유사한 역할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목책열은 목주열의 외곽에 있고 내부에 주혈이 촘촘한 것으로 보아 목주열보다는 강한 방어적 기능을 가진다고 생각된다. 이에 비해 목주열은 목책열에 비해 방어적 기능은 떨어지지만 목주열과 목책열을 상호 병렬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서로 엇갈리게 배치하는 점이 특징이다. 목주열은 주혈 사이의 공간에 횡으로 나무를 설치하여 방어의 기능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럴 경우에 횡으로 연결된 나무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목책열이 방어나 구획의 기능을 전담하였다면 목주열은 건축구조물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상태로는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기타 관련시설로는 출입문이 있으며, 출입문은 동쪽과 서쪽에서 2개소가 확인된다. 모두 목책열이 진행되다 개방되는 형태일 뿐, 별다른 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그 중 서쪽의 출입문이 비교적 양호하다. 서쪽 출입문은 목책열 서1과 목주열 서1, 2 중간에 목책열과 목주열이 개방된 부분으로 별다른 시설은 없고, 다만 목책열 서1의 끝부분에 목책열 서1과 직교하는 길이 1.5m, 폭 40㎝ 규모의 구상유구가 보일 뿐이다.
② 내부관련시설
목책열과 목주열에 관련되는 내부시설로는 수혈유구, 고상가옥(굴립주건물), 주혈군, 우물 등이 있다. 현재 유적의 상부가 대부분 파괴되어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정한 배치양상을 엿볼 수 있다.

* 목책과 목주열은 넓은 의미에서 구획과 방어의 용도로 설치되었을 것으로 판단되어 둘 사이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본 글에서는 등간격으로 설치된 주혈열은 목주열이라 칭하고 좁고 깊은 구내부에 작은 주혈이 촘촘하게 설치되어 있는 것을 목책열이라 명명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목책열 6과 목주열 서1 사이 공간에는 수혈유구는 별로 보이지 않고 주혈군이 집중적으로 보이며, 그 외는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목책열 6과 목주열 2 사이의 경우 중앙에는 수혈유구들이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원형으로 나타나며, 그 외곽인 목주열 부근에는 다수의
주혈군이 확인된다. 그리고 유적 동쪽에 목주열 동 1과 목책 8사이 공간의 경우 목책열 8의 서쪽 출입구를 기준으로 해서 북쪽에는 수혈유구가 주로 보이고, 남쪽에는 수혈유구가
보이지 않는 반면 주혈군이 집중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치양상을 가지고 다소 무리한 추론을 해보면, 목책열 6과 목주열 서3 사이는 건물지와 광장, 목책열 6과 목주열 동2 사이는 작업 또는 특수공간(제의, 저장)과 건물지, 목책열 8과 목주열 동 1의 북은 작업 또는 특수공간과 건물지, 목책열 8과 목주열 동1의 南은 건물지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로 파악되는 유구는 C1 그리드와 C2 그리드에 확인된 주거지 2동과 다수의 수혈유구 그리고 우물이 있다. 주거지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이며, 내부에 노지와 기둥구멍이 확인된다. 가호 주거지의 경우 주거지의 서편 절반 가량이 파괴되었는데 규모는 현길이 295㎝, 잔존깊이 20㎝이다. 나호 주거지의 외곽에 지름 30-50㎝, 깊이 40㎝내외의 주혈이 배치되어 있다. 주거지 바닥에서 옹기편과 백자편이 출토되었다. 수혈유구는 원형 또는 부정형이며, 내부에 별다른 시설이 없다. 규모는 100~150㎝ 내외이다. 우물은 A3 그리드에서 확인되었으며,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우물상단의 지름은 150㎝이다.


2. 遺物

청동기시대의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의 경우 발형과 호형이 있다. 문양의 구성은 5호 주거지에서 이중구연에 단사선문이 시문되어 있는 토기 구연부편이 출토되었고, 4호 주거지에서는 반관통공열토기와 사선문이 시문되어 있는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6호주거지에서 반관통공열토기가 출토되었다. 석기는 주상편인석부, 합인석부, 미완성석촉, 반월형석도, 석검, 지석, 박편, 연석 등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수혈유구의 내부에서 대호, 편병, 주름무늬소병, 완 등의 토기류와 다수의 와편이 출토되었다. 그 외 노적에서 청동완 1점이 출토되었다. 철기류는 철솥, 철정, 용도불명의 철편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 상부 퇴적층에서 금동방형금구 1점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의 유구에서는 옹기편과 백자편이 출토되었다.


Ⅴ. 調査成果 및 意義

가. 금번에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평면형태, 내부시설 등이 울산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동해안 일대의 전형적인 주거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취락단위의 유적이
활발하게 조사되고 있어 취락과 취락사이의 연계 및 변천과정의 연구와 더불어 영남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청동기시대의 지역상 연구에 좋은 자료를 더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나. 본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의 취락은 후대의 경지정리 등으로 인한 훼손이 심한 관계로 취락의 구성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조사지역의 능선 서편사면에 집중 분포하는 구상유구(굴립주건물)를 창고시설로 추정할 경우에는 주거와 창고시설이 분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이중구연의 단사선문이 시문된 토기편과 공열토기 그리고 사선문과 주상편인석부 등을 통해 볼 때, 주거지 간의 시기차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 조사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목책열과 목주열은 대형의 구조물로 판단되며 그 성격에 대하여는 3가지가 상정된다. 그 하나는 대규모의 병영과 같은 관방시설로 보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일본의 거관유적과 유사한 성격인 지방호족의 거처 및 특수 공간으로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정되는 것은 지방의 역 및 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받쳐줄 적극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첫번째와 두번째는 조사지역 가까이에 다수의 성곽이 분포하고 있는 점, 그리고 목책열과 목주열 내부에 뚜렷한 주거용 시설이 확인되고 있지 않는 점 등이 문제가 된다. 세번째의 성격은 문헌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역․원은 경주를 중심으로 관도 주위에 설치되었으며, 동남방면의 역은 朝驛(조양동), 仇驛(구어리) 등의 기록이 나와 있다. 경주 중심을 기준으로 조역과 구역 그리고 본 유적이 등간격에 위치하고 있고 모두 경주의 동남방면 관도로 추정되는 7번 국도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사실이 주목된다. 향후 목책열과 목주열로 이루어진 시설물에 대한 성격을 밝혀내는 것이
금번 조사의 최대 과제라고 할 것이다.

 

유적 전경
1호 주거지(4주식)
3호 주거지(6주식)
수로
목책열및 목주열 전경
목책열및 목주열 세부
조선시대 주거지 "나"호
3호 주거지 출토유물
3호 주거지 출토 천하석제 곡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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