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설명회

서변동 마을유적 발굴조사 Ⅱ

시대 신석기,청동기,삼국
성격 취락,생활유적,분묘
회수 22
개최일자 1999.11
조회수 1,870
대구 동서변 택지개발지구내 서변동 마을유적 발굴조사 Ⅱ


Ⅰ. 조사개요

가. 유적위치 :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670번지 일대

나. 조사기간 : 전 체 - 1998. 10. 15~2000. 1. 7.(예정)
                   1구역 - 1998. 10. 15.~1999. 3. 6.(완료)
                   2구역 - 1999. 3. 8.~2000. 1. 7.(예정)

다. 조사범위 : 18,740 坪(61,950㎡)

라. 조사기관 : (재)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李白圭)

마. 조사의뢰기관 : 대구광역시 도시개발공사


Ⅱ. 조사경과

동서변택지개발사업지구에 대한 문화재조사는 대구광역시 도시개발공사의 의뢰로 우리
연구원이 지표조사(1995년) 및 시굴조사(1997년)를 거쳐 1998년 10월 15일부터 약16,040평에 대한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1999년 3월 6일에 1구역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였다. 1구역에 대한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및 현장설명회(1999. 3. 3)의 결과에 따라 2구역의 조사대상지역이 일부 확장(전체 약18,740평)되어 지금은 2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1구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집석유구와 빗살무늬토기가 확인됨으로써 대구를 비롯한 금호강유역의 문화적 기원을 살피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배후습지 등에서 다량의 토기와 석기 및 목제유물이 출토되어 대구지역 선사문화의 연구에 필요한 고고자료를 다수 확보하게 되었다. 1구역에 대한 조사내용과 성과는 앞서의 현장설명회자료에 소개된 바 있다.(영남문화재연구원 현장설명회 자료 19, 1999. 3)
금번 현장설명회는 현재 진행중인 2구역의 조사내용에 대한 소개로서, 1구역에서 이어지는 청동기시대의 장방형, 방형 주거지와 석관묘, 삼국시대의 논(水田)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앞으로 하층조사가 계속 이루어지면 신석기시대의 문화층도 추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본 유적의 주변에는 칠곡택지구내 동천동 및 구암동유적, 연암산유적, 침산유적, 검단토성, 팔달동고분군, 서변동고분군, 봉무토성, 봉무동 및 불로동고분군 등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분포한다.


Ⅲ. 조사내용

본 유적이 위치하는 지역은 桐華川의 서쪽부분으로 함지산에서 형성된 도둑골의 선상지대와 동화천의 범람성퇴적지대가 접하는 곳이다. 이 일대는 八公山(해발1,192m)을 배경으로 북쪽의 鷹峰(해발456m)과 동쪽의 鶴峰(해발280m), 서쪽의 函芝山(해발287m)에 의해 둘러 싸여져 있으며, 그 사이로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금호강과 합류하는 동화천이 유적의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또 이 곳은 도곡골에서 흘러내리는 2개의 지류가 동화천과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관개의 용이성과 범람퇴적물 등으로 인해 선사 이래로 농업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화천의 상류를 공산못으로, 도곡천의 상류를 도곡못으로 차단하고, 하천가에 제방을 쌓는 등 물길을 조정하여 광범위한 하류 퇴적지를 농경지로 전환시켰으며, 근․현대에 이루어진 경지정리로 한저들, 방울들, 동변앞들로 불리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유적의 주변은 최근까지 논과 밭 등의 경작지와 소규모 공장, 축사 등이 위치하며, 음성골에는 현재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지금까지 서변동유적의 1,2구역 발굴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주거지, 집석유구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배후습지, 溝, 석관묘가 조사되었으며, 삼국시대의 논(水田), 溝, 畝口(이랑)狀유구, 수혈과 조선시대의 도수시설이 조사되었다.

1. 청동기시대

가. 住居址
서변동 유적에서 검출되고 있는 주거지는 크게 두가지 형식으로 대별된다. 하나는 평면형태가 장방형이면서 노지를 1개 내지는 2개를 가진 형식과, 다른 하나는 평면형태가 말각방형이면서 노지가 없이 가운데 타원형 수혈과 그 주위에 2개의 주혈을 가진 형식이다. 특이한 점은 이 두 형식의 주거지가 서로 섞이지 않고 따로 모여있다는 점이다. 물론 36호 장방형 주거지가 35호 주거지보다 이전에 형성된 주거지이기는 하지만 노지가 없을 뿐 아니라 방형주거지가 장방형주거지군에는 보이지 않는다. 전자의 형식은 유적 중앙을 기점으로 현재까지 남쪽으로만 검출되고 있으며, 후자의 형식은 그 북쪽에 8기의 주거지가 군집
조성되어 있다.
장방형 주거지의 경우 노지는 단벽 한쪽 가운데에 만들어져 있으며, 모두 무시설식이다.
주거지의 장축방향은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동-서나, 북동-남서 방향을 하고 있다. 이는 청동기시대 당시의 구하도의 흐름방향과 일치하고 있어서, 주거지의 조성에 있어 자연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말각방형 주거지의 경우에는 31호 주거지가 여타 말각방형 주거지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32호에서 38호 주거지가 한곳에 밀집되어 있는 반면 31호 주거지는 이들과 약 30m의 거리를 두고 유적 최북단에 조성되어 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타원형수혈이나
주혈은 보이지 않고, 무시설의 노지가 한쪽 모퉁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31호를 제외한 나머지 말각방형의 주거지들은 그 규모나 내부시설의 검출형태가 유사하다.
한변의 길이가 4m를 넘지 못한 반면, 그 현존깊이는 30~50㎝정도로 장방형주거지에 비해 깊은 편이다. 내부시설의 경우 32호와 38호가 중앙부의 타원형 수혈 양쪽에 주혈이 있는 형태이고, 그외 주거지 4동은 타원형 수혈 없이 주혈만 2개가 있는 형태이다. 공통의 특징이라면 모두 주혈의 연결선이 거의 동-서 방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두 형식의 주거지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장방형 주거지의 경우 구순각목이나 공열토기가 출토되는 반면, 방형주거지는 문양없는 심발형이나 천발형의 토기가 출토되며, 유물의 양도 장방형 주거지에 비해 적은 편이다.

나. 석관묘
현재까지 모두 5기의 석관묘가 조사된 상태이다. 석관묘가 확인되는 곳의 주변이 삼국시대 수전지역으로, 조사가 진행되면 유구가 더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서변동 유적에 있어서 석관묘의 특징은 첫째, 조성위치가 장방형 주거지군에 섞여 있다는 점이다. 유적의 북쪽으로는 석관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방형주거지군 주위의
수혈중 일부는 분묘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유구도 몇 기 있다.
둘째는 석관묘의 조성위치가 지형상 舊河道에 인접한 곳이라는 점이다. 이는 당시인들이 묘제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의 특징으로는 석관묘가 매우 소형이라는 점이다. 석관내부의 규모로 보아 성인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도 매장하기 어려운 크기이다. 따라서 시신의 안치방법에 있어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 집석
집석은 유적 전체에서 골고루 존재하고 있다. 대개 일정한 범위안에 원형이나 부정형, 산재형 등 평면형태가 다양한 조성위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원형이나 부정형을 띠면서 상당히 밀집한 경우의 유구는 그 내부에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석재들은 사암이 주종을 이루고 일부 역암, 편마암이 보이고 있다. 석재들은 전체적으로 약한 붉은
색을 띠는 것으로 보아 불에 의해 데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유구의 용도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구상유구나 하도 주변에 조성된 집석의 경우 형태가 없이 산재되어 있는 반면, 유물은 다양하고 수량도 많은 편이다. 역시, 사암계통의 석재가 많으나 위의 집석들과는 그 용도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라. 구상유구
청동기시대의 구상유구는 방형주거지 지역에 주거지들과 중복되거나 이들 주거지군 외곽에 남북방향으로 조성된 것들이다. 장방형주거지군 지역에서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주거지와 중복된 구상유구의 경우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인위적이라기 보다 자연적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반해 주거지군과 떨어져 조성된 구상유구의 경우 그 규모가 크고, 집석유구가 주위에 조성된다든지, 진행방향이 남북으로 이어지는 점들은 유적내의 구획과 같은 의도성이 있는 유구로 여겨진다.

마. 굴립주 건물
굴립주 건물은 모두 3기가 확인된 상태이다. 2기는 장방형 주거지군 부근에서 확인되었고, 나머지 1기는 방형주거지군과 가까운 곳에서 확인되었다.
장방형 주거지군에서 확인된 2기는 서로 근접하여 조성되었는데, 주위에 연결이 안되는
주혈들이 흩어져 있어 또 다른 굴립주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방형주거지군 주위에 조성된 3호 굴립주의 경우 1기만 주거지군과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상적 주거용이라기 보다는 다른 용도의 건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 굴립주 건물의 규모에 있어서는 측면 1칸이면서 정면이 각기 다른데, 이들 유구가 서로 동시기의 것인지, 그 용도가 무엇인지가 해결과제라고 할 것이다.

2. 삼국시대

가. 논 유구(水田)
1)조사방법
유적 내 논 조사대상지역은 東西 80m, 南北 140m로 면적은 약 5400㎡(1,640평)이다. 삼국시대 수전이 형성된 곳은 지형상 선상지와 하천에 의한 범람성퇴적으로 이루어진 충적평야지대로, 北高南底를 보이는데 남북의 레벨차가 최고 1.6m이다. 최근까지도 이곳은 논과 일부 밭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매몰 논 유구의 확인은 청동기시대 문화층을 확인하는 과정중에서 트렌치 토층을 통해서였는데, 최소한 5개층 이상의 논층이 약 30㎝의 두께로 퇴적되어 있었다. 수전유구임을 확신케하는 증거로는 토층단면에서 논의 경계를 보여주는 狀과 階段狀의 논둑단면 및 異質土의 혼입, 아래층에서의 산화철․망간의 분리집적 등을 확인하였다.
이에 조사대상지역의 중심부에서 십자상으로 트렌치를 설정하고 남북 및 동서토층을 관찰하고 각층을 구분, 해석하여 동일한 시기의 층을 표시해 上部로부터 가, 나, 다…순으로
고유번호를 매겼다.
논의 평면조사는 이들 5개층 이상의 논층 중에서 가장 상태가 양호하게 파악되는 ‘가’와 ‘나’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도면 3, 참조). 일단 토층단면에서 확인된 논둑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로 평면을 확장시켜 나갔다.
한 층의 조사가 끝나면 유물수거 후 각 논면마다 plant-opal분석, 기생충분석을 위한 흙시료를 채취하였다.

2) 조사내용
삼국시대에 있어 논의 구획과 이용은 최하층과 최상층의 논둑이 거의 같은 지점에 만들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이전의 상태를 최대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사된 ‘가’층이나 ‘나’층의 경우 논둑지점이나 논둑의 형태가 서로 비슷하고, 논둑이 가로지르는 방향도 동서방향으로 역시 비슷하였다.
‘가’층의 경우 ‘나’층보다 조사대상면적이 적어 모두 7개의 면이 노출되었는데, 대부분의
논둑이 동서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는 반면 남북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논마다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논둑의 형태는 狀과 계단상이 혼합되었다.
‘나’층의 경우 전체적으로 14개의 논면이 확인되었고, ‘가’층에 비해 논 사이의 남북폭이 거의 비슷하고, 남북으로 연결되는 둑도 확인되는 등, 논의 평면형태나 면적의 산출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논의 단위당 평면형태는 장방형(나-11면:단위면적 약 80평)및 세장방형이나, 대개 동서로 가로지르는 논둑에 의해 구분되는 계단상을 보이고 있다. ‘나’층에서도 논둑은 狀과 계단상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며 논과 논의 물대기를 위해 조성한 水口도 확인되었다. 수구의 경우 폭 20㎝로 그 바닥높이가 윗쪽의 논바닥과 같고, 수구 가운데에는 수시로 물을 막기위해 사용한 길쭉한 돌 1점이 중앙부에 놓여 있었다.
‘가’와 ‘나’층 모두 평면에서 사람발자국과 소발자국, 경작도구자국이 확인되었다. 특히 경작도구자국의 경우 폭 10㎝, 깊이 5㎝정도로 1m이상으로 길게 파여져 있는데 쟁기의 사용을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진행방향이 논둑의 진행방향과 모두 일치하고 있다. 다만, ‘가’층의 경우 그 도구자국이 불규칙하면서도 깊이가 일정하지 않은 반면, ‘나’층의 경우는 그 진행방향이나 길이 등이 일정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층에서 조사된 사람발자국의 경우 좌우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 내부토는 하천범람에 의해 채워진 적갈색 사질토여서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다. 발의 길이는 18㎝에서
25㎝사이가 많았다.
논의 정확한 사용연대에 있어서는 온전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으나 ‘가’층의 경우 6세기 후반~7세기로 보이고, ‘나’층의 경우에는 6세기대로 보고 있다.

나. 畝口(이랑)狀 유구
유적의 북편 확장구간에서 확인된 성격불명의 유구로서, 황갈색 사질점토의 삼국시대층에서 형성되었다. 10.5x27m 규모의 장방형으로 구획된 중에서 폭 20~50㎝정도의 넓은 구가 일정의 간격으로 나열되어 7개소 검출된다. 그 사이사이에서 폭 20㎝내외, 깊이 10~15㎝의 비교적 좁은 구가 약간 방향을 달리하여 비교적 간격을 두고 나타나고 있다. 내부토는 사질토로 채워져 있는데 유수로 인한 단기간의 매몰로 보여진다.
유물로는 석부, 석도, 석검, 석촉편과 와질토기편 등이 이곳에서 수습되었으나 본 유구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단정하기 어렵다. 향후 본 유구와 유사한 자료의 조사를 통해 형성연대와 성격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Ⅳ. 출토유물
․청동기시대 : 무문토기, 홍도, 지석, 석부편 , 어망추 등
․삼국시대 : 고배편, 호편, 토구 등


Ⅴ. 조사성과 및 의의

1. 대구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삼국시대의 논 유적에서 狀과 계단상의 논둑에 의해 만들어진 논의 평면형태와 논둑에 만들어진 水口(논둑의 물고), 논바닥의 사람발자국, 소발자국, 쟁기자국들을 확인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삼국시대의 논 구획형태와 牛耕 등 당시의 농경방법과 그 수준을 상정해 볼 수 있으므로 이는 고대사회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2. 서변동유적에 대한 1,2구역의 조사를 통해서 신석기시대 뿐만아니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관련유물들을 다수 확인함으로써 앞으로 대구지역의 문화적 기원과 선사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러한 성과를 거둔 이번 조사는 사실상 지표조사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유적이므로 향후 유적의 분포가능성이 예상되는 입지(하천과 인접한 평야지대 등)에 대한 문화재조사는 시굴조사를 비롯한 적극적인 조사방법을 전개하여야 되겠다.
따라서 본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는 문화복원을 위한 귀중한 고고자료의 발굴과 더불어
문화재 조사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였음에도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유적 전경
12호 주거지
12호 주거지 출토 석기박편
말각방형 주거지
36호 주거지 출토 토기
1,2호 석관묘
1호 굴립주 건물지
삼국시대 수전('나'층)
삼국시대 수전 출토유물
묘구상 유구 전경

재단법인 영남문화재연구원 / 주소 : 39852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천평2길 43(천평리 221)
TEL : 054-971-8085 / FAX : 054-971-8083 / E-mail : ynicp@daum.net

copyright (c) 2016 ynicp.or.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