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설명회

大邱 漆谷 3地區遺蹟 發掘調査 대구 칠곡 3지구유적 발굴조사

시대 조선
성격 건물지
회수 13
개최일자 1998.06
조회수 2,071
大邱 漆谷 3地區遺蹟 發掘調査 - 建物址 遺蹟 -


Ⅰ. 調査槪要

가. 遺 蹟 位 置 : 大邱廣域市北 北區 國優洞 285番地 一帶

나. 調 査 期 間 : 1998. 2. 4~1998. 7. 10(예정)

다. 調 査 範 圍 : 3,109여평(10,277㎡)

라. 調 査 機 關 : (社)嶺南埋藏文化財硏究院(院長 : 李白圭)

마. 調査依賴機關 : 韓國土地公社 慶北支社


Ⅱ. 調査經過

한국토지공사는 1995년도에 대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결과에 따라, 대구시 북구 東川洞 및 國優洞일대에 위치하는 칠곡 3택지개발사업지역에 대한 시굴조사를
본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1996년 7월부터 12월까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결과, 4개 구역의 문화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본 원에서는 ⅠㆍⅣ區域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칠곡 3택지개발지구는 鳩岩洞古墳群과 2택지개발지구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三國時代의 大規模 生活聚落遺構와 연계된 유적이 분포할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시굴결과 靑銅器時代의 聚落과 高麗時代의 建物址 등이 확인되어 현재 발굴조사를 추진 중이다. 이번
조사는 칠곡 3지구내 4구역의 건물지조사로서 高麗時代의 地方官廳으로 추정되는 建物址
8동과 폐와무지 및 生産遺構로 추정되는 爐址가 확인되었다.


Ⅲ. 遺蹟의 歷史的 背景

漆谷은 三韓時代때 辰韓의 軍彌國과 弁韓의 弁軍彌國이 위치한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新羅時代때에는 斯同火縣․大木縣․八居里縣이 설치되었으며, 慶德王 16年(757年)에 각각 壽同縣․谿子縣․八里縣으로 개칭되어 수동현과 계자현은 星山郡(星州)에, 팔리현은 壽昌郡에 속하였다.
高麗初에 壽同縣이 仁同縣으로, 谿子縣이 若木縣으로, 八里縣이 八居縣(또는 八莒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顯宗 9年(1018年)에는 인동현과 팔거현이 京山府(星州)의 屬縣이 되었다. 高麗末에 이르러 恭讓王 2年(1390年)에는 인동현에 監務가 파견되어 약목현도 겸임하였다.
朝鮮初에 인동현에는 감무대신 縣監을 파견하였으며, 약목현은 인동현의 속현으로, 팔거현은 성주목의 속현으로 하였다. 宣祖 26年(1593年)경에 慶尙道 監營이 일시 팔거현으로 옮겨지면서 이 지역이 중시되었으며, 그 결과 1604年에 天生山城이 축조되고 仁同縣이 都護部로 승격되었으며, 仁祖 18年(1640年)에 八居縣에 茄山山城이 축조되면서 八居縣은 漆谷都護部로 승격하였다. 高宗 32年(1895年) 甲午改革떄 23部制가 실시됨에 따라 칠곡군과 인동군으로 개편되어 大邱府에 속하였으며, 다음해 13道制가 실시되자 慶尙北道에 소속되었으며, 1981年에 大邱直轄市에 編入되었다.


Ⅳ. 調査內容

가. 遺構

1. 建物址
건물지가 위치한 지역은 구릉이 낮게 내려오는 선단부로 주변은 낮은 저습지이다. 구릉의 양쪽은 물에 의해서 재퇴적이 이루어진 곳으로, 기와, 돌, 훍 등으로 지반을 성토한 후 건물을 축조하였다. 건물지는 瓦葺積心建物 6동, 堀立柱建物 2동 등 모두 8동이 확인되었다. 건물지는 최소한 2차에 걸쳐서 전체적으로 증축되었으며, 수축과정에서 부족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1차 건물지와 주변을 황색점토로 성토하고 2차 건물을 지었다.
건물군의 배치는 동쪽에 2호․6호․7호, 서쪽에 1호․5호, 남쪽에 3호, 4호, 북쪽에 8호건물지가 위치한다. 이들은 모두 한 건물군의 구획내에 위치한다.

1) 1호 건물지
1호 건물지는 2개의 기단 석열에 의해서 상단과 하단으로 구성되며, 내부에는 모두 4동의 건물지가 위치한다. 건물의 주축방향은 N8°W로 정북방향이다. 건물지는 최소한 2차에 걸쳐서 증축되었으며 증축과정에서 기단 서쪽과 내부를 황색점토로 성토했다. 1-1호 건물지에서는 배수로와 1차 건물시기의 진단구(도면4-1)가 확인되었는데 건물내부를 황색점토로 성토하면서 내부에 매납했다. 1-2호 건물지 내부에서 확인되는 소토유구(9호, 16호)는 모두 2차 건물지의 성토층 상면에 위치하는 점에서 2차 건물시기의 유구로 볼 수 있다.
건물의 서쪽부분은 후대의 경작과정과 논뚝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북쪽 역시 파괴로 인하여 불분명하다. 각 건물의 기단 전면에는 폐와와 토기편 등이 폭 3.6m정도로 폭 넓게 깔려 있는데 보도와 같은 기능을 한 부석군으로 추정된다.
1-1호 건물지는 하단에 위치하는 건물로 2차에 걸쳐서 중창되었다. 내부에는 배수시설이 있으며, 서쪽에는 건물확장에 따른 ‘ㄴ’자상의 성토구간(길이 320~700㎝, 폭 320~650㎝)이 존재하고 있다. 성토부는 내부에서 귀목문막새가 출토되는 점에서 볼 때, 2차 건물 증축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차 건물의 잔존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원래는 정면 5칸, 측면 1칸일 가능성이 있으며 2차 건물에 의해서 대부분의 적심석이 제거되었다. 2차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추정되며 북쪽 및 동쪽에 배수시설을 갖추고 있다. 배수로는 벽석은 수적했으며, 바닥면은 판석으로 깔았다. 잔존길이 800㎝, 폭 70㎝이다. 건물지 내부에는 인위적인 성토층이 있는데, 증축시 지반층을 보강하기 위해서 서쪽 기단쪽에 기와, 돌 등으로 내부를 채우고, 그 위를 황색점토로 성토했다. 성토층 하부에서 귀목문막새가 출토되는 점은 1차와 2차 건물지 사이에 시기차이가 크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단석축은 기반층을 정지한 후 L자상으로 절토한 뒤 석축을 쌓고 내부를 뒷채움하였다.
1-2호 건물지는 상단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건물로 최소한 2차에 걸쳐서 중창되었다. 전면에는 ‘ㄷ’자형의 기단 석열이 위치하며 이를 기준으로 북쪽에 1-2호 건물지, 서쪽에 1-3호 건물지가 위치한다. 1차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추정되며, 기단 앞에는 1-1호 건물지와 동일한 부석군이 있다.
1차 건물의 잔존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동쪽에서는 적심석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기단과 빈공간의 존재로 볼 때 1-1호 건물지와 같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구조일 가능성이 있지만 단정할 수 없다. 2차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추정되며 1차 건물지를 재이용해서 중창하였다.
1-3호 건물지는 상단 기단의 서쪽에 위치하며 논뚝에 의해서 적심석의 일부가 결실되었다. 건물의 장축은 N3。W인 동향으로 상단기단과 일치되게 배치되었다. 잔존규모는 정면 2칸, 측면 1칸이지만, 원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지로 추정된다.
1-4호 건물지는 건물의 제일 북쪽에 위치하며, 경작에 의한 파괴로 적심석 2개만 잔존한다. 적심석사이의 간격은 250㎝이다.

2) 2호 건물지.
2호 건물지는 1건물지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후대의 배수로에 의해 건물의 ⅓정도가 파괴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2차에 걸쳐 증축되었으며, 화재에 의해서 폐기되었다. 건물의 장축방향은 N8。W인 동향으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부속시설로 마당과 작업공간이 있다. 마당에서는 탄화된 기둥재의 흔적이 확인된다.
건물의 양 단벽쪽에는 담장시설이 있는데 동쪽 중앙부에 디딤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때, 동쪽에 출입시설을 갖추었다. 건물 앞 마당은 길이 12m, 폭 6.4m의 공간의 전면에 잔자갈을 한 벌 깔았다. 마당은 2차에 걸쳐서 사용되었는데, 1차 건물은 생토면을 이용했으며, 길이 11m, 폭 5.4m 이다. 내부에 ‘ㄴ’자상의 석열이 존재하는데 담장에 부속된 시설일 가능성이 있으며, 서쪽에는 폭 155㎝의 瓦積基壇이 있는데 출입시설의 가능성이 있다. 2차 건물은 기단 밖에 석축을 1열 보강했으며, 공간을 확장시키면서 안마당에 황색점토와 잔자갈을 각각 한벌씩 성토하였다.

3) 3호 건물지
3호 건물지는 1호 건물지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4호 건물지 위를 성토하고 축조되었다.
건물지의 하부에서 확인된 溝에서 귀목문 숫막새가 출토된 점에서 볼 때, 3호 건물지의 시기는 1호 건물지의 2차 건물과 같거나 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현대 농수로와 논뚝에 의해서 건물지의 동쪽과 남쪽부분이 파괴되었다. 잔존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최소한 정면 7칸, 측면 1칸의 적심건물로 추정된다. 장축방향은 N110。E로 남향이며 길이 25.5m, 폭 3.5m이다. 건물지의 내부에는 잔자갈이 바닥면에 한 벌 깔려 있으며, 배수로로 추정되는 석열이 서쪽에 있다. 건물지 아래의 성토층에서 소토유구가 확인되었다(17호,18호).
배수구는 5칸과 6칸 사이에서 확인되었다. 배수구의 하단은 후대의 근대 논뚝에 의해서 파괴되었으며, 1-1호 건물지에서 확인된 배수구와 동일한 구조로 추정된다. 잔존길이 400㎝, 폭 70㎝.

4) 4호 건물지
4호 건물지는 3호 건물지의 서쪽에 위치한다. 3호 건물지의 성토층 아래에서 적심석이 확인되며, 내부토에서 귀목문 숫막새가 출토되는 점에서 볼 때, 4호 건물지는 3호 건물지보다 선대의 유구로 1호 건물지의 2차 증축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건물지의 장축방향은 N6。W로 동향이다. 근대의 경작으로 남쪽이 파괴되었지만 건물지의 잔존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원래 정면 3칸, 측면 1칸 이상의 적심건물로 추정된다. 잔존 길이 7.0m, 폭 3.0m.

5) 5호 건물지
5호 건물지는 굴립주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장축방향은 N20。E로 남향이다. 내부에는 타원형의 수혈이 있다. 건물 내부와 주변에서 다량의 소토와, 목탄 등과 불명철기,청동편 등이 출토된 점에서 볼 때, 공방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추정된다.

6) 6호 건물지
6호 건물지는 굴립주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2차에 걸쳐서 증축되었다. 6-1호는 장축방향이 N3。W 로이며, 6-2호는 장축방향이 N5。W 이다.

7) 7호 건물지
2호 건물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2호 건물지의 1차 담장석열을 제거하고 축조된 적심건물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의 장축방향은 N37。W인 북동향으로, 길이 9.0m, 폭 6.0m 이다. 건물 전면에는 3호 건물지로 이어지는 溝가 있으며, 건물 중앙에서 적심석의 하부에는 대호를 매납한 진단구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폐기원인은 화재로 내부에서 다량의 목탄이 확인되었다.

8) 담장
담장은 건물군 전체를 둘러싸는데 2차에 걸쳐서 부분적으로 증축되었다. 1차 담장은 2차담장석열 내부와 밖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형태는 양쪽으로 할석을 놓았으며 내부에는 돌을 깔고 내부에 흙을 채웠다. 잔존길이 3,540㎝, 폭 80㎝으로 타원형을 취한다. 2차 담장은 1차 담장을 안쪽으로 축소시켜서 만들었으며, 양쪽을 돌로 쌓고 내부에 기와, 돌, 명황색 점토 등이 채워져있다. 잔존길이 2,100㎝, 폭 100㎝이다.
1차 담장석열 밖에는 건물지를 신축하면서 부족한 공간을 확보하기위해 저습지를 매립한 성토층이 확인되었다. 매립방법은 동쪽의 낮은 저지대에 돌과 기와 등과 명황갈색 사질점토를 약 70㎝정도 깔았다.

나. 竪穴(爐)遺構

다. 出土遺物

유물은 건물지 내부와 주변부에서 출토되었으며 모두 고려시대 후기에 해당한다. 그 내용은 기와와 청자류가 주를 이루며 기타 금속제품 등이 있다.
와전류는 막새류와 평와로 나눌 수 있다. 막새는 鬼目紋막새가 주종을 이루는데 모두 同范瓦이다. 平瓦는 어골문계열이 주종을 이루며 銘文瓦가 2종류 확인되었다.
打捺板 1은 길이 14.0㎝, 잔존폭 3.8㎝의 장방형의 곽을 구획후 내부에 “君生△”의 銘文을 넣었다. 타날문은 斜線文으로 곽외부에 唐草文을 시문했다. 15호 폐와무지에서 출토되었다.
打捺板 2는 중앙부에 8葉蓮花文을 시문후 좌측하단에 “日”字를 새겼다. 연화문 안에 5개의 蓮子을 배치했으며 주문양은 魚骨文이다.
토기는 일상생활용기가 주를 이루며 기종은 시루, 호, 옹 등이다. 대호의 경우 건물지 주변에 단독으로 매납된 예가 확인되고 있는데, 진단구와 저장시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자기는 청자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일부 녹청자, 흑유, 백자 등이 있다. 청자는 상감청자와 철화청자가 주를 이루며 기종은 대접, 병, 종지, 탁잔 등이다. 康津 龍雲里系統과 지방가마 생산품이 주를 이룬다. 녹청자는 병이 확인되며, 백자는 편으로 확인된다. 기종은 대접으로 扶安 柳川里系統과 中國 元代白磁가 출토되었다. 본 유적에서는 지방요에서 생산된 청자가 주종을 이룬다. .
금속기는 장신구와 생활용구로 나눌 수 있다. 장신구로는 은제 뒤꽂이와 동곳이 있으며 생활용구로는 철제 저울추, 철제 괭이 등이 있다. 농경구는 대호 내부에 넣어진 채로 출토되었는데 진단구의 가능성이 있다. 석제품으로는 수정제 다면옥, 벼루 및 용범, 숫돌 등이 있다.
爐址에서는 다량의 Slag가 출토되고 있으며, 표면에서 확인된 철성분으로 볼 때 철 Slag의 가능성이 있다.


Ⅴ. 調査成果 및 意義

가. 漆谷 3地區 建物址遺蹟은 大邱地域에서 조사된 寺址이외의 대규모 건물지유적으로 地方官衙址로 추정되는데 그 의의가 크다.
나. 건물지는 적심건물지와 굴립주건물이 함께 있었으며, 건물의 존속시기는 2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초창과 중창 건물이 모두 同范瓦(鬼目紋막새)를 사용한 점으로 볼 때 큰 시간차이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 건물지의 시기는 고려시대 말기인 14세기를 전후한 때로 추정되며, 후대의 경작에 의해서 많이 파괴되었음에도 다양한 규모의 건물유구들과 각종 土器․陶器․磁器․金屬器 등 2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귀목문막새의 존재, 철화문청자, 녹청자와 지방요 청자 등의 공반관계로 볼 때 고려 후기문화상을 밝힐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라. 漆谷 3地區 建物址遺蹟을 계기로 중세 및 근세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관심이 새로워지기를 기대한다.


Ⅵ. 向後課題

가. 건물지의 성격문제.
나. 건물지와 수혈유구(노지)와의 관계.
 

유적 전경
1호 건물지
2,7호 건물지
3,4호 건물지
11호 수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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