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설명회

大邱 旭水洞, 慶山 玉山洞遺蹟 發掘調査 대구 욱수동, 경산 옥산동유적 발굴조사

시대 청동기,삼국,고려,조선
성격 가마,주거지,분묘
회수 6
개최일자 2001.08
조회수 2,302
대구 노인복지시설 신축예정부지내 유적 大邱 旭水洞 慶山 玉山洞遺蹟 發掘調査


Ⅰ. 調査槪要

1. 유적위치 :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 48-1번지 일원 / 경상북도 경산시 옥산동 671-1번지 일원

2. 조사기간 : 2000년 9월 20일 ~ 2001년 9월 30일(예정)

3. 조사면적 : 약 11,000㎡(3,327坪)

4. 조사기관 : (재)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 : 李白圭)

5. 조사의뢰기관 : (재)운경재단


Ⅱ. 調査經過

본 유적은 1976년이래 경산 중산동 토기가마유적으로 학계에 알려져 오고 있다. 우리 연구원에서는 이번 조사에 앞서 대구광역시 종합건설본부(삼덕동-시지택지간 도로건설)의 의뢰로 본 유적의 남쪽 일부 범위에 대하여 발굴조사(1998년)를 실시한 바 있다. 이번 조사는 대구시와 (재)운경재단 곽병원의 “대구시 치매ㆍ노인전문병원” 건립계획과 관련하여 2000년 3월 27일부터 동년 4월 15일까지 실시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토기가마와 석곽묘, 석실묘, 조선시대 토광묘 등에 대한 발굴조사이다.
조사지역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과 경상북도 경산시 옥산동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대구시 지역에 대해서는 2000년 9월 20일부터 동년 12월 31일까지 발굴조사를 완료하여 지도위원회를 실시하였고, 경산시 지역에 대해서는 2001년 3월 1일부터 현재까지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Ⅲ. 遺蹟의 立地 및 周邊環境

조사지역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과 경상북도 경산시 옥산동의 경계되는 지점에 위치한 해발 90.3m의 조그마한 야산이다. 유적의 남쪽으로는 대덕산, 병풍산, 금성산, 聖岩山, 안산 등과 같은 다소 높은 산지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남부산지의 북록에는 여러 갈래의 산줄기와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유적은 성암산에서 북으로 가장 길게 뻗어내린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남에서 북으로 흘러 南川에 합류하는 新梅川이 흐르고 있다.
이 지역은 조사 전에 이미 樹木園으로 이용되었던 관계로 전지역에 걸쳐서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고, 유적의 남쪽부분에는 집과 창고, 축사 등이 있었던 관계로 교란이 심한 상태였다. 그리고 유적의 동쪽부분은 乾泉池의 조성으로 인하여 유적의 상당부분이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곳곳에 토기편과 요벽체편이 흩어져 있었다.
주변유적에 대하여 살펴보면 남쪽으로는 玉山洞 유물산포지가, 북쪽으로는 中山洞古墳群이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 1㎞정도 떨어진 평지에는 靑銅器時代의 沙月洞․梅湖洞 支石墓와 住居址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時至地區 生活遺蹟과 蘆邊洞古墳群 등 삼국시대의 유적들이 폭넓게 分布하고 있다.


Ⅳ. 調査內容

1. 遺 構
지금까지 확인 조사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 삼국시대의 석곽·석실묘 20기, 토기가마 33기, 고려·조선시대의 토광묘 405기, 기타 5기 등 총 467기이다. 주거지는 산 정상부근의 사면에 입지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석곽·석실묘는 능선의 사면상에 위치하며, 토기가마는 주로 능선의 남동사면에 등고선과 직교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토광묘는주로 능선의 남·동사면에 등고선과 직교되게 조성되어 있다.

가. 토기가마
본 유적에서는 현재까지 33기의 토기가마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16기가 조사완료되었고, 나머지는 현재 조사중에 있다.
축조방법에 의하여 대략 분류하여 보면 대부분이 반지하식의 등요이고, 일부 지상식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반지하식의 등요는 대부분 지하부분은 잘 남아 있으나, 지상부분은 벽체나 천정부가 파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태이다. 지상식의 경우는 다른 토기가마의 회구부나 토기들이 퇴적되어 있는 위에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인접한 다른 토기가마의 바닥면 보다 높으며, 거의 바닥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1) 4호
유구는 조사구역의 남쪽 완만한 경사면인 해발고도 84~86.5m사이에 위치한다. 주축방향은 N-51°-E이고, 등고선과 직교되게 조성된 무계단식의 반지하식 登窯이다. 규모는 길이 약 10.1m, 너비는 연소실 190㎝, 소성실 180㎝, 연도부는 약 120㎝이다. 깊이는 연소실62㎝, 소성실 75㎝, 연도부 15㎝정도로 지금까지 이 유적에서 조사된 토기가마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회구부는 요체의 전방과 좌ㆍ우측에 폭넓게 위치한다. 4호 유구 주변에서는 다른 가마가 확인되지 않고, 북서쪽으로 약 35m떨어져서 가마 5호가 위치한다. 그리고 남쪽으로 50m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가마 3기(1·2·3호)가 1998년에 조사된 바 있다.
폐기된 이후 가마는 천정부나 벽체를 비롯한 지상부는 거의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고,지하부분만 남아 있다. 지하 부분도 후대의 교란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파괴된 상태이다.
① 焚口 및 燃燒室
분구는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가마 폐기 이후에 쌓인 퇴적토와 바닥의 소결상태,그리고 벽체의 잔존상태 등을 통해 위치만을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분구로 추정되는 부분에 조업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수혈(지름 230㎝, 깊이20~30㎝)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 수혈은 평면상에서 보면 분구와 바닥의 일부를 파괴하고 형성된 것으로, 그 내부에 가마의 조업과 관련해서 발생된 재, 소토, 소결된 가마 벽체편, 토기편들이 채워져 있었다.
연소실은 바닥과 양측벽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높이는 약 50~62㎝이다.
바닥은 암반층을 정지하고 일부 점토를 발랐는데 소결되어 회청색을 띠고 있으며, 그 위로 두께 5㎝미만의 얇은 잿층이 쌓여 있어서 최종 조업 당시의 흔적을 일부 관찰할 수 있었다. 그 잿층의 범위는 길이 150㎝, 폭 130㎝ 정도된다. 그리고 연소실은 높이의 차이나 별다른 경계시설없이 소성실로 연결된다. 연소실 바닥은 양쪽 가장자리가 중심보다 약간치켜 올라가 있으며 높은 열을 받아서 아주 딱딱하게된 상태이다. 단면조사에서 분구쪽에 2개의 소결된 바닥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2회 이상은 조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② 燒成室 및 煙道部
소성실의 천장 부분은 남아 있지 않으며, 동쪽 벽면중 일부는 벽체가 가마 안으로 밀려 있거나 넘어진 상태이다. 이러한 부분을 제외하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가마 내부에는 각종 부식토와 점토, 그리고 천정편, 벽체편이 퇴적되어 있었다. 그 퇴적상태로 보아 천정 및 벽체는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 아니고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서서히 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면은 비교적 편평한 부분과 갑자기 경사지는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연소실과 연결되는 소성실의 앞부분은 편평하고, 소성실의 중앙 부분정도에서부터 연도부까지는 약 13°정도로 약간 급한 경사를 이루면서 폭도 점차 좁아져 있다.
그리고 소성실의 바닥이 편평한 부분에서는 대호편이 일부만 깔려 있으며, 반면 경사를 이루는 뒷부분에서부터 연도부까지는 바닥에 대호편이 많이 깔려 있다. 이러한 대호는 조업에 따른 불량품이라기 보다는 도침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실의 편평한 부분은 암반을 파고 바닥에 점토를 깔아서 정지하여 바닥면이 소결되어 단단한 반면 경사를 이루는 부분부터는 암반을 파고는 정지한 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바닥면이 붉게 변색된 상태이다. 소성실은 토기를 적재하는 곳으로 앞 부분의 편평하고 넓은 공간에는 큰 기물을 그리고 경사진 부분에는 소형 토기를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는 약 860㎝, 바닥의 최대폭은 130㎝, 최대 높이 75㎝이다. 煙道部는 잔존상태로 보아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③ 灰丘部
회구부는 분구의 전방과 좌ㆍ우측에 형성되어 있는데, 가마 내부에서 꺼낸 목탄재, 소토, 토기편, 가마 벽체편, 천정편 등이 퇴적되어 있었다. 회구부는 최근까지 이루어진 경작과 수목의 이식으로 인하여 상당부분 훼손·파괴된 상태였다. 회구부에 대한 조사는 가마의 장축방향과 나란하게 둑을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5×5m 단위의 소규모 Grid를 구획하였다. 조사는 먼저 기준둑과 나란하게 트렌치를 설정하여 전체 토층을 파악하였다. 토층은 크게 4개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최대두께는 60㎝ 정도였다.
회구부는 대부분 바닥을 자연적인 지표면 그대로 이용하고 있으나 전방의 오른쪽 부분은 다소 큰 수혈이 파여진 곳에 퇴적되어 있었다. 이 부분은 토기제작이나 요벽체를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파낸 토사채취장이었던 것이 후에 폐기물에 의해 메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④ 遺物出土狀態
유물은 가마 내부 출토품과 회구부 출토품으로 나누어진다. 가마 내부에서는 도침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대호편과 몇점의 발형기대편이 출토되며, 대부분 바닥면에 붙어서 출토된다. 회구부는 크게 4개의 층위로 나누어지지만 출토유물은 소토, 재, 벽체편과 함께 섞인 상태로 출토되며, 시기적인 변화는 별로 관찰되지 않는다. 주요 기종으로는 대호, 기대, 단경호 등이며, 고배류는 1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회구부에서 성주 마월리 요지에서 출토된 일명 수날토기라 불리는 토제품이 1점 출토되었다.

2) 16호
유구는 조사구역의 북쪽 동사면인 해발고도 82~84m사이에 위치한다. 주축방향은 N-60°-W이고, 등고선과 거의 직교되게 조성된 무계단의 반지하식 登窯이다. 규모는 길이 약 680㎝, 최대폭 186㎝, 높이 45㎝ 정도이다.
유구의 조사전 상태는 연도부는 후대의 수목이식으로 인하여 파괴된 상태이고, 유구의 북쪽장벽 가운데 부분에는 민묘 366호에 의하여, 남장축의 연도부쪽은 민묘 367호에 의하여 일부 파괴된 상태이다. 그리고 회구부는 가마의 전방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저수지 공사로 인하여 이미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유구의 남쪽으로는 토가가마 17호가 나란하게 위치하고, 북동쪽으로는 토기가마 15호가, 서쪽에는 토기가마 14호가 위치하고 있다.
① 焚口 및 燃燒室
분구는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남아있는 퇴적토와 바닥의 소결상태, 그리고 벽체의 잔존상태 등을 통해 위치를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연소실은 전체적으로 퇴적토가 검은색 재와 목탄 등이 많이 섞여 있었으며, 바닥과 연소
실의 오른쪽 측벽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나, 왼쪽 측벽은 일부 파괴되어 잔존상태가 불량하다. 바닥은 풍화암반면을 판 것이 아니라 적황색 점질토층을 파고, 정지한 후 부분적으로 점토를 발랐는데 회청색과 회황갈색으로 소토화되어 있다. 그리고 연소실 의 높이의 차이나 별다른 경계시설 없이 소성실로 연결된다.
② 燒成室 및 煙道部
지상부분은 파괴되고 지하부분만 남아 있는데, 잔존하는 벽체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소성실에서 연소실까지 이어지는 벽체는 여러 번의 조업을 하면서 보수가 이루어졌던 흔적으로 벽체가 약 4겹정도로 단단하게 소결된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현상은 단면조사에서도 나타나는데, 4개의 소결된 바닥면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보아 최소한 4회 이상 조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소실과 연결되는 소성실의 앞부분은 편평하고, 소성실의 중앙 부분정도에서부터 연도부까지는 약간 경사를 이루고 있다.
煙道部는 후대의 교란으로 인하여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灰丘部는 가마의 전방에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후대에 이루어진 저수지 공사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③ 遺物出土狀態
유물은 가마 내부 출토품과 상부출토품으로 나누어진다. 가마 내부에서는 층위별로 유물이 출토되는데, 호편이나 고배편으로 대부분 파편의 상태로 출토된다. 상부출토유물은 마지막 조업이 이루어진 단계 이후에 퇴적된 층에서 나오는 유물로서, 대부분 호편 등이다.
마지막 조업단계에서 출토된 어망추의 경우는 경주 경마장부지내 A지구에서 출토된 소형의 것들과 유사하다.

3) 21호
유구는 유적의 정상부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의 표고 82~84m지점에 등고선과 직교하는 무계단식의 반지하식 등요이다. 경사면의 윗쪽에 위치하는 토기가마 10호의회구부를 파괴하고 조성되었다. 가마 폐기 이후에 쌓인 퇴적토와 바닥의 소결상태, 그리고 벽체의 잔존상태 등을 통해 볼 때 최소한 3차례 이상은 보수․보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잔존길이 1차 약 625㎝․2차 약 620㎝․3차 약 590㎝, 최대너비는 170㎝, 잔존높이 20㎝ 정도이다. 연소부에서 소성부에 이르는 경사도는 12°이며, 주축방향은 N-61°-W이다. 회구부는 요체의 전방에 폭넓게 위치한다. 주변에는 토기가마 20호가 북쪽으로 3m 떨어져 나란하게 위치하며, 경사면 아래쪽으로는 토기가마 19호가 위치한다.
폐기된 이후 가마는 천장부나 벽체를 비롯한 지상부는 거의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고, 지하부분만 남아 있다. 지하 부분도 후대의 분묘 조성과 경작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파괴된 상태이다.
① 焚口 및 燃燒室
분구는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최종 조업시의 위치만이 추정되어지고 있다. 잔존상태로 추정되는 분구의 폭은 47㎝ 정도이다.
연소실은 양측벽과 바닥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높이는 10~17㎝이다. 바닥은 잿층과 높은 열을 받아서 소결된 바닥면 3개층이 확인된다. 소결면은 회청색을 띠고있다. 좌측벽은 돌로 만든 벽체에 점토에 식물성 부재를 섞어 쌓은 벽체로 보수․보축한 것이 확인되며, 우측벽은 점토에 식물성 부재를 섞어 쌓은 벽체를 활석으로 보강하고 있다.
보수․보축한 2차 벽체는 1차 때 보다 폭과 길이가 좁아졌다. 그리고 연소실은 높이의 차이나 별다른 경계시설 없이 소성실로 연결된다.
② 燒成室 및 煙道部
소성실은 후대의 교란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상당부분이 파괴된 상태였다. 양측벽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으며, 바닥도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양측벽은 점토에 식물성 부재를 어 쌓았는데 정면 흔적이 벽면에 손자국으로 남아있다. 바닥면은 명황갈색 풍화암반토 위에 점토와 모래를 일부를 깔아서 정지하였고, 연도부까지 일정한 경사면과 폭을 유지한다. 절개된 부분의 단면을 보면 3개층 이상의 소결된 바닥면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3회 이상은 조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③ 灰丘部
회구부는 분구의 전방에 형성되어 있다. 자연경사면을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가마 내부에서 꺼낸 목탄재, 소토, 토기편, 가마 벽체편 등이 퇴적되어 있었다.
④ 遺物出土狀態
유물은 가마의 바닥에서는 출토된 것이 없고, 가마 폐기후 퇴적층에서 출토된다. 대부분호편이나 고배편으로 파편의 상태로 출토된다.

나. 石室墓

1) 2호
유구는 유적의 정상부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표고 84~85m지점에 등고선 방향과 직교되게 위치하는 횡혈식석실묘이다. 북서쪽으로 약 10m정도 떨어져서 석실 1호묘가 위치하며, 그 주변으로 조선시대 토광묘가 분포하고 있다.
조사전 석실은 후대 교란 등으로 봉분이 거의 삭평되었고, 교란구덩이가 군데군데에서 확인되었다. 석실은 평면형태가 방형이며, 규모는 남-북 240㎝, 동-서 230㎝, 최대높이 70㎝이다. 유구의 주축방향은 N-22°-W 이다. 벽석은 2단 정도 남아 있으며, 축조방법은 30~50㎝정도되는 다소 큰 천석과 10㎝내외의 소형 천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연도는 남쪽 우측에 위치하며, 규모는 길이 100㎝, 폭 90㎝ 정도이다. 시상은 2차까지 확인되는데, 1차 시상은 20~30㎝정도되는 천석을 2~3단으로 북벽에 붙어서 동-서방향으로 폭 60㎝, 높이 30㎝ 정도의 크기로 축조하였다. 2차 시상은 1차 시상을 제외한 바닥의 전면으로, 잔자갈이 2~3겹 정도로 깔려 있다. 석실의 남쪽부분을 제외한 주위로는 주구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봉토의 지름을 추정하면 동서 850㎝, 남북 800㎝정도 된다. 주구의 규모는 폭 120~300㎝, 깊이 20~30㎝이다. 주구내에는 황갈색 사질점토가 퇴적되어 있었으며, 후대에 조성된 토광묘로 인해 일부 파괴되었으며, 특별한 시설이나 유물은 없었다.
유물은 1차 시상에서는 출토되지 않았고, 2차 시상의 북서쪽모서리 부분에서 단각고배 세트 7점, 대부완 1점, 대부호 1점, 적색연질발 2점, 병 1점이 출토되었다.

2) 10호
유적의 중앙 정상부 해발고도 89~90m정도되는 지점에 위치하는 횡혈식석실묘이다. 주축방향은 N-30°-E이고, 잔존규모는 길이 230㎝, 너비 100㎝, 높이 40㎝ 정도이다. 봉토는 이미 삭평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석실 내부에는 황갈색사질점토와 무너진 벽석재들로 채워져 있었다. 벽석은 20~40㎝정도의 납작한 천·할석을 이용하여 평적하였다.
시상은 북벽에 붙어서 동-서로 설치하였고, 크기는 길이 200㎝, 너비 45㎝, 높이 10~20㎝정도이다. 시상석은 20㎝내외의 납작한 천석을 이용하여 시상 외곽에 2단으로 쌓아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쪽에 10㎝내외의 편평한 천·할석을 1겹 깔아서 시상을 마련하였다.
연도는 석실의 좌측편에 설치되어 있고, 크기는 길이 65㎝, 너비 70㎝ 정도이다. 연도의 퐤쇄는 20㎝내외의 천석을 이용하여 막음하였으며, 현재 2단정도 남아있다.
유물은 시상 남동모서리에서 개 1점과 시상 중앙에서 청동제 과대부속구 2점이 그리고 우벽 아래와 석실 중앙에서 교구가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그리고 석실 남벽중앙에서 남쪽으로 70㎝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제사토기로 추정되는 연질토기가 출토되었다.

3) 12호
유적의 중앙 해발 87~88m지점에 위치하는 석실묘로서 주축방향은 N-23°-E이고, 잔존규모는 길이 218㎝, 너비 87㎝, 높이 40㎝ 정도이다. 유구는 봉토를 비롯한 상부와 동쪽벽이 완전히 유실되어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유구의 평면형태, 시상의 구조 등으로 보아 횡혈식 석실로 추정된다. 석실은 황갈색사질점토층을 굴착한 후 대형 할석을평적하여 축조하였는데 대부분 파괴하고 1-2단 정도만이 남아있다. 시상은 2차까지 확인되는데 1․2차 모두 서벽에 붙여서 남북으로 설치하였고, 규모는 길이 210㎝, 너비 45㎝ 정도이다. 2차 시상은 15~20㎝정도 크기의 편평석을 1단으로 깔았으며, 1차 시상은 20~30㎝정도의 편평석을 동쪽시상 외곽에 놓아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쪽에 소할석과 역석을 아 마련하였다. 유물은 2차시상 중앙에서 과대부속구 2점과 남벽가까이에서 고배 1점, 병1점이, 1차시상에서 수하이식 3점이 출토되었다.

다. 토광묘
토광묘는 유적의 남ㆍ동사면과 남서사면에 주로 분포하면서 등고선과 직교되게 배치되어 있는 고려·조선시대 분묘로서 지금까지 405기가 조사되었다. 규모는 묘광의 경우 길이150~230㎝, 폭 50~100㎝, 깊이 30~70㎝정도이고, 목관의 경우는 길이 150~200㎝, 폭 40~80㎝, 높이 20~40㎝정도가 보통이다. 출토유물은 대접, 접시, 종지를 비롯한 자기류와 청동수저, 청동합과 같은 청동류, 그리고 가위나 관정과 같은 철기류 등이다.

1) 20호
석실 1호에서 북동쪽으로 약 2m 떨어진 해발 86m지점에 조성된 조선시대 토광묘이다.
주축방향은 N-46°-E이며, 규모는 길이 132㎝, 너비 45㎝, 깊이 34㎝ 정도이다. 유구는 황갈색 풍화암반층에 장방형의 묘광을 파고 축조되어 있는데, 내부는 상면에서 약 5~8㎝깊이까지는 부식토로 채워져 있었으며, 그 아래로는 명황갈색 사질점토로 채워져 있었다. 목관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바닥은 암반면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북쪽부분에서 치아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피장자의 복부부분에서 ‘順治通寶’라고 명기된 동전 2점과 구슬들이 출토되었고, 상부 교란층에서 철기 1점과 청동제 반지 1점이 출토되었다. ‘順治通寶’에 새겨진 ‘順治’는 중국 淸나라 世祖(1644년~1661년)때의 年號이다.

2) 127호
유적의 남사면 해발 80m되는 지점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토광묘이다. 주축방향은 N-23°-E이며, 규모는 길이 210㎝, 너비 80㎝, 깊이 50㎝ 정도이다. 유구는 황갈색 풍화암반층에 장방형의 묘광을 파고 조영되었으며, 내부에는 길이 180㎝, 너비 50㎝크기의 목관을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북쪽 머리부분에서 동곳 1점과 중앙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청동숟가락 1점, 남쪽 발치쪽에서 청동합과 청동경 그리고 철기가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그리고 관정 9점이 목관선을 따라 출토되었다. 동곳의 출토위치로 보아 피장자의 침향은 북침이며,유물의 종류로 보아 피장자는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3) 385호
본 묘는 유적의 정상부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표고 84m지점에 등고선 방향과 직교되게 위치하는 토광묘이다. 현 지표상에서 표토층을 약 10㎝ 제거한 후, 황갈색사질점토층에서 유구의 굴광선이 확인되었다. 토기가마 20호의 우측 벽체 부분을 일부 파괴하고 조성되었다. 주변에 토기가마 20호, 21호가 위치하며, 남서쪽에 후대 수목이식 과정에서 생긴 구덩이에 의하여 상부가 많이 삭평된 상태였다.
묘광의 규모는 장축 180㎝, 단축 38㎝, 최대깊이 20㎝이고, 평면비는 4.73 : 1 정도이다.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이며, 유구의 주축방 향은 N-55°-W 이다. 묘광은 황갈색사질점토를거의 수직으로 굴착하고 조성되었다. 내부는 망간괴가 다수 혼입된 10YR 5/6 황갈색 사질점토로 채워져 있었다. 목관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고 명황갈색 풍화암반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유물은 북서모서리에 분청인화인수부명집단연권무늬대접이 1점, 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불명철기 3점이 출토되었다.
분청인화인수부명집단연권무늬대접은 기형이 내만형(內彎形)이고 태토는 밝은 회색을 띠며, 유조(釉調)는 회청색의 투명유가 시유되었고, 굽은 시유되지 않았으나 정교하게 처리되었다. 내면무늬는 4단 구도로 안바닥 중앙 원권 안에 소국화무늬와 함께 「仁壽」두 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고, 그 우측 상단에 「府」자가 단독으로 새겨져 있다. 그 주위로 나비문양이 시문됨으로써 한 무늬대를 이루었다. 다시 그 주위에 중연판무늬대, 그리고 아가리의 풀잎 무늬대의 사이 넓은 측면에는 집단연권소국화무늬로 가득 압인하고 네 곳에 소국화무늬 중심으로 나비 4마리를 배치하였다. 외면무늬는 3단 구도로 아가리에서 좀 떨어져 풀잎무늬대, 그리고 넓은 측면에는 내면과 같은 집단연권소국화무늬대로 가득 압인하였다. 굽 주위에는 소국화무늬가 한 줄 있고 굽 옆에는 卍자무늬를 시문하였다. 인수부가 1400년에서 1556년 사이에 존재한 세자부이고, 그릇의 내․외면에 시문된 무늬가 빈틈없이 압인한 점, 무늬대의 구성 등으로 보아 15세기 중엽경의 제작품으로 판단된다.

4) 404호
유적의 동쪽사면 해발 81m지점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토광묘이다. 주축방향은 N-30°-W이며, 규모는 길이 199㎝, 너비 61㎝, 깊이 14㎝ 정도이다. 유구는 삼국시대 토기가마의 폐기장에서 확인되었으며 묘광의 북동쪽 모서리부분은 토기가마 23호를 파괴하고 조성되었다. 묘광의 내부에는 길이 183㎝, 너비 42㎝, 높이 16㎝규모의 목관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확인된다.
유물은 머리측 바닥에서 단추모양의 옥제품 2점과 청동숟가락 1점, 접시 1점이 각각 출토되었다. 옥제품은 머리장식의 하나라고 생각되며 청동숟가락과 접시는 목관위에 매납되었던 것이 내려앉은 것으로 추정된다.

2. 出土遺物

본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삼국시대를 비롯하여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는 무문토기, 석부 등이 있다. 삼국시대 유물로는 토기요지에서 출토된 고배, 기대편, 대호편, 단경호편을 비롯한 토기류와 토제마, 토우, 어망추를 비롯한 토제품 등이 있고, 석실묘에서는 부가구연장경호, 인화문이 시문된 대부완과 뚜껑, 유개고배, 편병 등이 있다.
고려~조선시대 유물로는 도질병, 도질옹, 대접, 접시, 종지 등의 토도류와 청동 수저, 청동합, 청동거울, 반지, 동곳 등의 청동기류, 그리고 철제가위, 관정과 같은 철기류와 옥류등이 출토되었다.

Ⅳ. 調査成果 및 意義

1. 이번 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 삼국시대 토기가마 33기를 비롯하여, 석곽묘 4기, 석실묘 16기, 고려ㆍ조선시대 토광묘 405기, 기타 5기 등 총 467기가 확인․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 삼국시대의 고배, 장경호, 대부장경호, 대부완을 비롯한 토기류, 그리고 고려ㆍ조선시대의 대접, 접시, 청동수저, 청동합 등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어 대구․경산지역의 고대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2. 특히, 이번에 조사된 토기가마유적은 대구ㆍ경산지역의 토기 생산유적에 대한 중요한 연구자료로 평가되며, 발굴조사가 마무리되면 5~7세기대 신라토기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새로운 자료의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3. 토기가마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류와 같은 형식의 자료가 경산 임당동유적, 시지지구 취락지, 노변동고분군, 가천동고분군 등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의 토기 생산과 공급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시지지구에 대한 앞서의 조사에서 확인된 취락지, 분묘군과 더불어 생산유적이 확인됨으로써 향후 이 지역에 대한 고대 생활문화상을 복원ㆍ연구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4. 조선시대 토광묘에서 ‘順治通寶’와 「仁壽府」명이 새겨진 자기가 출토됨으로서 유물의 실제작연대를 알 수 있어 도자사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인근에서 조사된 내환동유적, 연호동유적과 비교, 검토하면 당시 이 지역의 고려~조선시대의 사회생활상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 전경
유적 전경
토기가마 4호
토기가마 16, 17호
토기가마 16호 토층
토기가마 21호
토기가마 21호 벽체
석실 2호
석실 2호 유물 세부
민묘 127호
토기가마 출토 토우
토기가마 출토 토제류
토기가마 출토 토제류
토광묘 출토 유물
토광묘 출토 자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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