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설명회

金泉 帽岩洞遺蹟 發掘調査 김천 모암동유적 발굴조사

시대 삼국(신라)
성격 고분,취락
회수 3
개최일자 2000.05
조회수 1,569
경부고속철도 건설구간 내 金泉 帽岩洞遺蹟 發掘調査


Ⅰ. 調査槪要

가. 유적위치 : 경북 김천시 모암동 94-18번지 외 18필지

나. 조사기간 : 1차 - 1999. 5. 10~1999. 6. 28      
                     2차 - 1999. 9. 13~2000. 6. 20(예정)

다. 조사면적 : 약 4,700평(1차:200평, 2차:4,500평)

라. 조사기관 : (재)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 : 李白圭)

마. 조사의뢰기관 :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Ⅱ. 調査經過

김천 모암동유적은 우리 연구원이 1996년에 실시한 김천시 문화유적 지표조사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1997년 12월에 실시한 경부고속철도 대구․경북권 발굴예비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우리 연구원에서는 1998년 12월 31일부터 1999년 6월 28일까지 실시된 고속철도구간내 문화유적 시굴 및 발굴조사 기간 중, 모암동유적 내 4,500평에 대해서는 시굴조사(4월 1일부터 4월 20일)를 실시하여 다수의 유적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고,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봉토분 3기(200평)에 대해서는 발굴조사(1999년 5월 10일부터 6월 28일)를 실시하였다. 시굴조사지역에 대한 2차 발굴조사는 1999년 9월 13일부터 시작하여, 동계기간(1999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2월 20일)에 작업을 일시 중지하였다가, 조사를 재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Ⅲ. 遺蹟의 立地와 環境

조사지역은 김천시 帽岩洞 소재 해발 106.2m의 조그마한 야산에 해당하며 유적의 북쪽으로는 경부고속국도가 지나고, 直指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 甘川에 합류한다. 유적주변에는 富谷洞古墳群, 平和洞古墳群, 城內洞古墳群, 新音洞古墳群, 校洞古墳群, 德谷洞古墳群 등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金泉市 文化遺蹟地表調査報告書, 1996년, 嶺南埋藏文化財硏究院). 삼한 소국중의 하나인 甘文國이 김천시 개령면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일찍부터 세력집단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전, 지표에는 삼국시대 분묘로 추정되는 분구가 능선을 따라서 등간격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동쪽 사면에도 1기의 분구가 육안으로 확인되었다. 이외에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유구는 없었으나, 시굴조사를 통해 이 곳에 다수의 생활유적이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城內洞古墳群은 원래 帽岩洞古墳群과 같은 능선에 조성된 古墳群인데, 능선이 근대 건물 조성시 잘려져 지금은 양분되어 있는 상태이다.
주지하듯이, 주변에는 다수의 古墳群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중 특히, 高城山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려온 능선의 말단부에 조성된 富谷洞과 平和洞古墳群이 그 규모를 감안할 때, 이 지역의 中心古墳群으로 추정된다. 김천시 남쪽에 솟아 있어 김천시를 감싸는 高城山 정상에는 山城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Ⅳ. 調査內容

1. 遺 構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는 삼한~삼국시대의 주거지 33기와 수혈 9기, 삼국시대 석실이 6기, 석곽 10기, 고려시대 석곽 9기와 토광묘 3기, 조선시대 토광묘(목관묘 포함) 59기 등 모두 131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대부분 능선의 사면에 입지하고 있는 양상을보이고 있고, 석실분은 대개 능선의 정상부를 따라 입지하고 있는 양상이다. 삼국시대 석곽묘는 주축방향이 등고선과 평행하게 조성된 반면, 고려시대 석곽묘는 등고선과 직교되게 조성된 점이 특징이다. 고려시대~조선시대 분묘는 유적의 전 범위에서 고루 확인되었다. 주거지 주변에는 생활유구로 보이는 다양한 형태의 수혈이 확인되고 있어, 유구가 추가될 가능성이 있다.

가. 주거지

주거지는 입지에 따라 2가지 양상을 보인다. 즉, 급경사면에 입지한 것은 등고선과 평행한 방향으로 평면형태가 반월형 또는 장방형을 보인다. 현재의 지형을 살펴보면 舊지형도현재와 유사했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원형․말각방형․장방형 주거지들이 삭평, 유실되어 반월형이나 장방형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런 형태의 주거지들은 유적내 서쪽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이 지점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다른 양상의 주거지는 경사도가 약하거나 거의 평탄면에 가까운 곳에 입지하며, 평면 형태가 말각방형과 장방형으로 유적 중앙과 동쪽사면에 분포한다. 이곳에 입지한 주거지들은 유적 서사면에 입지한 주거지들보다는 규모가 크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주혈이 있는 것(6호, 7호주거지 外)은 물론이지만, 주혈이 없는 것(11호 주거지)도 벽체를 조성했음을 확인하였다.
현재, 유적의 동쪽 완경사면의 주거지는 모두 조사중이며 향후 조사진척에 따라 주거지의 다양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1) 2호
유적 서쪽 남서사면에 있고, 북서쪽 50cm에 1호 주거지가 있다. 황갈색 암반층에서 노출된 유구는 평면형태가 말각방형으로 추정되며 남쪽이 유실되었다. 유구의 규모는 428×(340)cm, 깊이 53cm이고, 내부에는 대체로 점성이 많고 매우 단단한 황갈색 사질점토 등이 퇴적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북변 양단에 치우쳐 직경 40cm, 깊이 50cm가량의 주혈이 2개 확인되는데, 특히 단면 관찰로 보아 동쪽의 기둥은 주거지 중앙부쪽으로 기울게 설치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바닥면은 암반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며 남서편에 치우쳐 장경 60cm정도의 붉게 소토화된 부분이 관찰되는데 노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외의 시설로는 북동쪽의 주혈 주변에 암갈색 사질점토가 채워진 小穴이 1개 확인된다. 유물은 내부토 제거중에 토기편 몇점만 수습되었다.
2) 7호
유적 서쪽 서사면에 조성되어 있고, 7호 수혈과 연접해 있다. 남서쪽에는 6호 주거지, 남동쪽에는 8호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다. 황갈색 암반층에서 노출된 유구는 평면형태가 장방형이고, 북서부가 근대 분묘에 중복되었고, 서장부가 유실되었다. 유구의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하고 잔존규모는 장축 645cm, 단축 238cm, 깊이 75cm이다.
이 주거지는 상부구조가 화재로 탄화되어 잔존하며, 경사면에 등고선을 따라서 형성된 길(?)유구와 연결되어 나타났다. 조사결과, 유구의 축조는 ‘길’이 먼저 만들어진 후 주거지를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床面의 확보를 위해 주거지 안쪽에 포함되는 ‘길’부분을 메워서 整地하였다. 건물의 축조는 먼저 동장벽쪽 양단에 主柱 2枚를 세우고, 그 사이에 폭 40~50cm, 높이 10cm가량의 둑을 쌓고, 그 위에 18枚의 壁柱를 세우고 둑과 벽주 外面에황갈색 점토를 발라 벽체를 형성시켰다.
兩主柱의 간격은 450cm이고, 북쪽 主柱는 단면관찰로 보아, 주거지 중앙부로 경사지게 설치되었다. 벽주는 직경 10~15cm, 깊이 5cm내외이고, 각기 간격은 5cm정도이다.
노출 상태로 보아 벽주는 폭 16~18cm이고, 길이는 최대 92cm이다. 이 벽주 위로는 주거지의 장축방향으로 진행하는 폭 3cm내외의 목재가 확인되는데 벽주를 橫으로 가로지르게 설치되었던 架構材로 판단된다. 벽주 밑으로는 폭 20cm의 목재 2매가 확인되며 측정가능한 최대 길이는 133cm이다.
床面은 암반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床面 중앙부에는 폭 25cm, 깊이 2~5cm의 얕은 溝(?)를 만들었다. ‘길’과의 연결부분에는 벽주가 확인되지는 않았고, 관찰결과 주거지 안쪽으로 무너진 벽주 밑에 소토덩어리와 황갈색점토가 노출되었으며, 그 밑에 두께 2~4cm의 탄화된 잔가지들이 노출되었다. 즉, 소토 및 점토는 출입구와 관련있던 地上의 시설이 건물의 화재와 더불어 무너지면서 벽주 밑에 깔리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화재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3) 11호
유적 서쪽 남서사면에 있고, 남단부가 21호 주거지에 중복되었고, 22호, 23호 주거지를 중복하였다. 황갈색암반층에서 노출된 유구는 평면형태가 반월형을 띠며 잔존규모가 장축 610cm, 단축 260cm, 깊이 56cm이고, 장축방향이 등고선과 평행하다.
유구는 건물의 상부구조가 화재로 탄화되어 잔존하며, 중앙부에 장축 315cm, 깊이 20cm정도의 평면 半月形의 수혈이 있다.
주거지 내에서 주혈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확인되지 않았는데 상부구조의 노출 상태를 관찰해보면, 상부구조는 벽면과 벽가를 따라 폭 5cm 내외의 목재들이 촘촘히 주거지의 단축방향으로 노출되며, 그 위에 장축방향의 목재들이 노출되었다. 특히 가장 밑에서 노출된 단축방향의 목재들은 부분적으로 황갈색점토와 뒤섞여 노출된 양상이었는데, 이로보아 5cm 내외의 목재를 이어 세우고 황갈색 점토를 발라 벽체를 형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부에는 단축방향의 목재들이 유물을 덮고 있었다.
유물은 내부 퇴적토 중에 다량의 토기편이 수습되었으며, 중앙부 수혈 내에서 단경호 1점과 양이부호 1점이 노출되었다.
4) 25호
유적의 동쪽 사면 해발 약 85m지점에 위치하며 주축방향은 동-서향이다. 주거지의 동쪽부분은 도로공사로 인해 자려져 나가 단애면으로 형성되어 있어 주거지의 동쪽 일부가 파괴되었다. 또 표토 바로 아래층에서 주거지가 확인되기 때문에 주거지의 상면은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따라서 주거지 내부는 바닥면과 주혈들만 확인되고 벽체나 굴광 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주거지 내부에는 여러 개의 교란 구덩이들이 주거지를 파괴하였다.
자연유실과 교란 등으로 인하여 주거지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주거지의 형태와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주혈들이다. 주거지의 주혈은 크게 내주혈과 외주혈 그리고 기타 주혈들로 구성되어 있다. 외주혈은 주거지의 벽체 바깥을 따라 촘촘히 돌아가며 내주혈은 벽체 안쪽을 따라 확인된다. 내주혈은 주거지의 서쪽 부분에 있어 두 겹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기타 주혈은 내주혈의 내부와 외주혈의 바깥 등지에서 확인되는 주혈이다.
내주혈과 외주혈은 폭 15㎝내외의 溝 내부에 형성되어 있으며, 거리는 약 110㎝ 정도이다. 일부 남아있는 벽체흔(황색 점토와 황갈색 사질점토)을 통해 볼 때 벽체시설은 내주혈과 외주혈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외주혈에 있어 주혈간의 간격은 5~20㎝정도이고 깊이는 10㎝내외 정도이다. 내․외주혈 모두 경사면 아랫쪽 즉 주거지의 남쪽 장벽 부분은 확인되지 않았다. 기타 주혈들은 다수가 확인되고 있으며 일부는 외주혈의 바깥을 따라 비교적 정형성을 띠는 것으로 생각된다.
외주혈을 기준으로 볼 때 주거지의 규모는 길이가 약 11m 정도로 추정된다. 주거지내에벽체나 기타 시설을 통해 공간이 분할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고, 다만 주거지의 중앙부에 남북으로 이어지는 폭 10㎝정도의 溝가 배수구역할과 공간분할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주거지의 바닥은 대부분이 파괴되고 잘 남아있지는 않지만 불다짐이 일부 확인된다. 바닥이 유실된 부분의 생토는 붉게 소토화되어 있다.
유물은 주거지의 내부에서 定置되어 출토된 것은 없으며 모두 내부토와 함께 片으로 출토되었다.

나. 석실분

1) 1호분
해발고도 86m선상에 조성되어 있으며 능선상에 분포하는 고분 중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圓形封土墳이다. 墳丘의 규모는 직경 10~12m, 높이 1.9m로 비교적 분구의 형태가 잘 남아 있었다. 분구는 개석상면까지 대부분 삭평되어 있었고, 개석위에는 표토가 20~30cm 정도 덮혀 있었다. 분구에는 盜掘痕이 여러군데 남아 있었고, 남동쪽 일부는 잘려져 나갔다. 조사당시 남단벽쪽에 蓋石 1매가 도굴구내에 떨어져 있었고, 도굴구를 통해 석실내부가 들여다 보였다.
조사결과, 主槨인 횡구식석실(1-1호)과 副槨인 수혈식석곽(1-2호)이 확인되었고, 토층상태로 보아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분의 축조는 우선 구지표면을 정지한 후 일정 높이까지 판축한 다음, 되파기를 하여 벽석을 쌓고 개석을 설치하였다. 개석을 설치한 후 다시 봉토를 쌓아 분구를 구축하였다. 3호분과는 달리 벽석과 묘광사이에도 판축을 하여 벽석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440cm, 폭 120cm, 높이 170cm이고 蓋石은 길이 160~190cm, 폭 50~70cm 정도되는 장대석 4매가 석실의 중간부에 남아 있었다. 남단벽쪽 도굴구에는 개석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1매가 매몰되어 있었고, 북단벽 앞쪽에는 개석이 유실되었으나, 남아있는 공간을 고려해 볼 때 2매의 개석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개석은 모두 7매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벽석은 길이 100~130cm, 폭 50~70cm 정도의 판석을 세워쌓기 하였는데 양장벽은 6매씩, 북단벽은 2매를 세로눕혀쌓기 하였다. 양장벽석은북단벽쪽에서 남단벽쪽으로 나올수록 큰 판석이 사용되었다. 남단벽과 접하는 판석이 규모가 가장 컸다. 남단벽은 도굴로 인하여 墓道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시상석이 북쪽에 치우쳐 있고, 남단벽쪽에 부장칸이 조성된 점, 남단벽의 구조가 북단벽과 다른점 등 여러 상황으로 보아 남단벽이 입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은 길이 190cm, 폭 80cm의 큰 판석을 석실 가운데에 놓고 그 주위에는 비교적 평평한 할석을 1겹 깐 다음, 그 위에 작은 강돌을 다시 1겹 깔아 시상을 조성하였다. 북단벽에서 남단벽쪽으로 270cm되는 지점까지가 시상으로 구축되었고, 시상의 끝 지점에는 할석
5개를 나란히 놓아 부장칸과 구분하였다. 남단벽 앞의 부장칸에는 단조철부 1점이 출토되었고, 여러점의 이형철제품의 출토양상으로 보아 평면 규격이 70×60cm 정도되는 부장궤를 매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곽의 규모는 길이 160cm, 너비 70cm, 높이 90cm로 벽석은 6단 정도 쌓았다. 벽석은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양장벽과 단벽을 맞물리게 쌓았으며 북단벽은 직선적으로 남단벽은 둥글게 쌓았다. 석곽 내부에서는 토기류만 41점이 출토되었는데, 長頸壺, 短頸壺 등을 놓고 주변에 高杯, 蓋와 같은 소형토기는 3단정도 겹쳐 매납하였다. 바닥은 생토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2) 3호분
조사구역 내 가장 위쪽에 조성된 圓形封土墳이다. 조사결과, 횡혈식석실 1기와 수혈식석곽 1기가 한 분구내에 동시에 축조되었다. 석실과 석곽은 지상식으로서 완만한 자연경사면을 편평하게 정지한 후, 벽석과 분구를 구축하였다.
분구는 크게 2층으로 나눌 수 있는데 Ⅰ층은 벽석 하단과 같이 쌓은 층이고 Ⅱ층은 벽석 상단을 덮은 층이다. 특히 Ⅰ층은 구지표면에서 일정 높이까지 판축상으로 성토한 후 다시 되파기하여 벽석을 쌓았다. Ⅱ층 성토 후에는 분구 基底部를 “ㄴ” 字狀으로 깍아내고 護石을 축조하였다. 護石의 직경은 11~12m이고, 호석의 무너진 상태로 보아 최소 2~3단 정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석 아래에서는 소토가 일부 확인되나 성격은 알 수 없다. 능선 위쪽에 해당하는 동쪽 호석 바깥에는 폭 2.4~4m, 깊이 15~40cm의 周溝가 남아 있다.
석실은 右便羨道의 橫穴式石室로서 바닥 폭이 330cm인 방형이다. 벽석은 5단정도 잔존해 있고, 북서 모서리가 盜掘로 인해 파괴되었다. 벽석은 30~50cm정도되는 할석을 세로쌓기 하였다. 羨道는 길이 100cm, 폭 90cm가 남아 있고, 墓道는 봉토의 유실로 확인되지않았다. 屍床은 2조가 後壁쪽에 나란히 붙어 확인되었는데 동시축조가 아닌 追加葬으로 판단된다. 1차 屍床은 길이 262cm, 폭 80cm, 높이 20cm이고 좌벽과의 사이에 할석을 깔아 副葬間(1차부장간)을 만들었다. 2차 시상은 1차 시상과 나란히 설치되었는데, 길이 252cm, 폭100cm, 높이 20cm이고 頭枕石과 足座石을 설치하였다. 屍臺石으로 보아 피장자의 키는 167cm내외로 판단된다. 석실 남서모서리에는 둥글게 일열로 할석을 돌려 부장칸(2차부장칸)을 조성하였다. 유물은 1차 부장칸에서 철기 1점, 연도 부근에서 대부옹 1점이 출토되었고, 도굴구 및 석실 내부에서 교란된 상태로 고배편, 대호편 등이 수습되었다.
3) 4호분
조사구역 내 서쪽사면 하단부에 조성된 원형봉토분이다. 분구의 규모는 직경 10~11m로 비교적 형태가 잘 남아있다. 조사결과, 한 분구 내에 주곽인 횡구식석실(4-1호)과 부곽인 수혈식석곽(4-2호)이 확인되었고, 토층상태로 보아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분의 축조는 우선 풍화암반층을 일부 굴착한 다음, 벽석을 쌓으면서 봉토를 동시에 성토하였다. 봉토 끝단부에는 50cm내외의 할석을 2~3단으로 쌓아 호석을 축조하였으며, 호석 바깥에는 120~140cm 폭의 주구가 확인되었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400cm, 너비 102cm, 깊이 178cm정도이다. 주석실의 장축방향은 N-2。-W로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며, 석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벽석은 70~90cm 크기의 대형할석을 사용하였는데, 대형벽석 사이에는 15cm 내외 크기의 소형할석을 끼워 축조하였다. 벽석축조는 세로쌓기로 비교적 정연하게 쌓았으나, 양장벽 남편은 토압에 의해 석실내부로 밀려들어와 현재 오목한 형태를 띄고 있다.
남단벽은 최하단 1단을 제외하고는 폐쇄석으로 확인되었으며, 묘도부는 양장벽 끝에서 「八」자상으로 벌어지는 형태로 확인되었다. 남쪽에 위치한 횡구부는 40~60cm 정도의할석을 가로방향으로 놓아 5단으로 폐쇄시키고 그 뒷부분에는 50cm 내외의 할석을 이중으로 채워서 보강하였다.
시상은 50~80cm 내외의 판판한 할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쌓아 축조하였으며, 규모는 길이 310cm, 폭 140cm, 높이 38cm정도이다. 유물은 동장벽 끝단부 바닥에 유개고배 6점, 대부완, 파수부배, 단경호 2점이 매납되었다.
부곽의 규모는 길이 116cm, 폭 68cm, 깊이 81cm로 주축방향은 N-3。-W이다. 벽석은 대형할석과 판석형할석을 혼재하여 사용하였으며, 시상은 15cm내외의 할석을 이용하여 「L」자 형태로 테두리를 돌려 구획하였다. 시상의 규모는 길이 85cm, 폭 30cm 정도로유물은 북동쪽모서리에 붙여서 2열로 부장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고배 4점, 개 7점, 단경호 2점, 유개발, 유개부가구연장경호 등이 있다. 피장자의 침향은 은제이식1쌍이 북쪽시상대 쪽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북향으로 추정된다.
4) 21호분
유적의 동사면에 위치하는 횡혈식석실분으로, 분구는 후대에 삭평되어 그 형태를 추정할 수 없고, 황갈색사질점토 퇴적층을 굴착한 뒤 벽석과 봉토를 구축한 것으로 여겨진다. 호석과 주구는 능선 윗쪽에 해당하는 북서쪽에만 남아 있으며, 50~70cm 내외의 할석을 사용하여 2단으로 쌓았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370cm, 너비 380cm이고, 석실의 규모는 길이 230cm, 너비 190cm,높이 92cm이며, 평면형태는 방형이다. 벽석은 현재 4단정도 잔존해 있고, 북서모서리의 벽석은 근대묘 조성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벽석은 70~90㎝정도되는 할석을 종평적하였으며, 할석사이에는 규모 10㎝내외의 소형할석으로 보강하였다.
횡구부는 남단벽 서쪽에 설치된 창틀구조이며, 남단벽석이 후대 교란으로 유실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횡구부는 먼저 석실 쪽에 40~80cm 크기의 할석을 세로와 가로 방향으로 놓아 2단으로 폐쇄시키고 그 뒷부분은 소형할석을 2~3단 놓아 보강하였다. 묘도부는 타원형으로 길이는 130cm이고 너비는 92cm이다. 시상대는 동서방향으로, 우선 큰할석들을 이용하여 테두리를 2단으로 돌리고 그 내부에는 10~25cm의 소형할석으로 채웠다. 시상규모는 길이 210cm, 너비 88cm, 높이 32cm이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다. 삼국시대 석곽묘
1) 10호
유적의 서쪽사면 해발 약 93.3~94.8m 지점에 위치하며, 묘의 주축방향은 동남-서북향으로 등고선방향과 평행하다. 묘가 위치한 곳은 산의 계곡성지대여서 많은 양의 土砂들이 퇴적되는 지형이고 또 전체적으로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벽석의 유실이 심하다. 다수의 벽석들이 석곽 내부로 함몰되어 있었으며 남아있는 벽석은 1~3단가량이다. 남장벽의 약 절반가량은 최근에 교란․파괴되었다.
묘는 산의 경사면을 「L」자상으로 굴착하고 회갈색 사질점토(산의 퇴적토)와 명적갈색사질점토(생토) 등을 이용하여 교대로 성토하였다. 성토한 높이는 현존 55㎝가량이고 한단위의 두께는 대략 5~10㎝ 정도이다. 묘광은 성토층을 되파기하였으며 규모는 354×160㎝가량이다. 묘광의 북동쪽 약 150㎝지점에는 반원형의 주구와 호석을 설치하였다. 주구는 묘광과 마찬가지로 성토층을 되파기 하였으며 폭은 대략 90~170㎝정도이다. 호석은 묘광 아랫쪽 부분은 자연유실되었으나 묘광의 북쪽 부분은 1~2단 정도 남아있다.
석곽은 평적하였으며 254×88㎝(바닥석 기준)이다. 벽석의 대부분은 토압으로 인해 내부로 함몰되었으나 현존하는 벽석은 네 벽 모두 가로쌓기를 위주로 하고 부분적으로 세로쌓기하였다. 벽석의 동쪽 단벽쪽에는 입구부를 마련하고 시신을 안치한 후 폐쇄석으로 막았다. 폐쇄석은 1단 가량 남아있으며 나머지 공간은 돌과 흙으로 뒷채움하였다. 묘광의 바닥은 얇은 판석이나 다소 면이 고르지 못한 자연석으로 시상을 마련하였다. 시상의 면적은 동단벽쪽인 횡구부쪽이 넓고 서단벽쪽이 좁은 형태이다.
유물은 한 점도 확인되지 않았다. 원래부터 박장했을 것이지만 묘광의 남동쪽에 있는 최근의 교란 때문에 유물이 파괴되거나 도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라. 고려시대 석곽묘
1) 13호
유적의 서쪽 능선 사면에 위치하는 고려시대 수혈식 석곽묘이다. 석곽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고, 묘광의 규모는 잔존길이 310cm, 너비 170cm이며, 석곽의 규모는 잔존길이 242cm, 너비 87㎝, 최대길이 81㎝이다.
벽석은 최고 5단까지 남아있으며, 경사로 인해 남단벽석은 삭평되어 유실되었다. 석곽의장축방향은 N- 32°-E로서 등고선 방향과 직교한다. 벽석의 양장벽은 30~40㎝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세로쌓기로 축조하였으며, 북단벽은 길이 75cm, 폭 118cm의 대형 판석재할석 1매를 수적하였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없이 생토층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유물은 북단벽쪽에서 청자병 2점이 바닥에 기울어진 채 출토되었고, 청동발 4점, 동제숟가락 1점, 동곳 1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석곽내부에 관정 33점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목관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며, 목관의 규모는 205cm, 폭 53cm로 추정된다. 석곽 중앙에는 길이 111cm, 폭 16cm의 범위로 네 모서리에 직경 6cm의 원형철제품 4점이 각각 출토되었는데, 놓여져있는 위치나 일정한 배치간격으로 볼 때, 목관에 쓰여진 관고리나 관장식으로여겨진다.

2. 遺 物

모암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삼한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각 시기별 유물이 확인된다.
삼한 시대 유물로 주거지 내에서 확인된 유물은 적갈색 연질옹류과 와질의 단경호류가 있고, 6호 주거지내에서 갈판이 1점 확인되었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다량의 토기편이 수습되는데, 주로 적갈색 연질, 와질의 단경호류와 시루 등이 있고, 도질토기류로는 대호 등의 대형토기류가 다수 관찰된다.
삼국시대 유물로는 유개고배, 유개단경호, 부가구연대부장경호, 병, 유개발 등의 토기류와 철재고리, 장식용 철제품, 철부, 도자 등의 철기류가 있고, 3-1호 석실에서 屍臺石으로 사용된 頭枕石과 足座石이 확인되었다.
고려~조선시대 유물로는 백자, 청자, 도질병, 도질옹 등의 토기류와 청동합, 청동수저, 청동집게, 반지 등의 청동기류, 가위, 관정 등의 철기류, 기타 옥류 등이 있다.


Ⅳ. 調査成果 및 意義

1. 김천지역에서 처음으로 삼한~삼국 초기(3~4세기대)에 해당하는 주거지가 다수 조사되어, 고대 주거건축기법의 양상과 주거유적의 입지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영남지역의 이 시기 생활유적으로는 대구 서변동, 경산 임당동, 경주 황성동유적 등 극히 일부만 조사되어, 이번 조사를 통해 당시 생활유적의 다양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 본 유적에서는 삼한시대로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 특히, 석실분 출토 토기류 일부에서 강한 지역색을 보이고 있고, 他지역으로부터의 반입품도 일부 출토되는 점으로 볼 때, 他地域과의 交流樣相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3. 삼국시대(6세기 중~후반) 석실분이 다양한 형태로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 석실의 구조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낙동강 중류역의 약목고분과 성주 성산동, 대구 비산동 등지에서만 확인된 판석조 석실분과 동일한 구조의 석실분(1호)이 조사되어 이들 지역과의 비교연구가 가능하게 되었고, 시상대의 구조가 상주․함창지역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들 지역과의 연관성이 상정된다. 또한, 신라 수도 경주에서만 출토되는 정형화된 頭枕石과 足座石이 3호 방형 석실분에서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3호 석실분을 비롯한 나머지 석실분의 피장자는 고대 김천지역의 수장급으로 추정되며 묘제와 유물의 비교검토를 통해 경주지역과의 상호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4. 1호 판석조 석실분과 4호 횡구식 석실분에서는 묘제와 유물에서 재지적 성격이 잔존하고 있으나, 이보다 늦게 조성된 3호와 21호 방형 석실분에서는 전형적인 경주적 묘제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지역의 수장층의 墓制와 遺物相이 6세기 중엽경까지 재지적성격이 강하게 존속하다가 중엽을 기점으로 전형적인 경주형인 방형 석실로 변한다. 이러한 양상이 『三國史記』眞興王 18(557)年條에 “沙伐州를 廢址하고 甘文國의 고지였던 開寧에 甘文州를 새로 설치하고 軍主 起宗을 派遣하였다” 라고 하는 기록과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 전경
2호 주거지
7호 주거지
11 호 주거지
25호 주거지
1-1호 석실
3-1호 석실
3-2호 유물
4호 석실
13호 고려석곽
13호 고려석곽 유물
11호 주거지 유물
1-2호 석곽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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