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설명회

大邱 西邊洞 마을遺蹟 發掘調査Ⅰ 대구 서변동 마을유적 발굴조사Ⅰ

시대 신석기,청동기,삼국
성격 취락,생활유적,분묘
회수 19
개최일자 1999.03
조회수 2,011
大邱 西邊洞 마을遺蹟 發掘調査Ⅰ


I. 調査槪要

가. 遺 蹟 位 置 : 大邱廣域市 北區 西邊洞 670番地 一帶

나. 調 査 期 間 : 전체- 1998. 10. 15. ~2000. 1. 7.
                       전체- 1998. 10. 15. ~1999. 3. 6.

다. 調 査 範 圍 : 약 16,040평(53,025㎡)중 5,300평(17,521㎡)

라. 調 査 機 關 : (社)嶺南埋藏文化財硏究院(院長:李白圭)

마. 調査依賴機關 : 大邱廣域市 都市開發公社


Ⅱ. 調査經過

대구광역시 도시개발공사는 대구시 북구 東․西邊洞일대에 대한 시굴조사를 본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1998년 2월부터 7월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靑銅器時代의 住居址, 溝, 시기불명의 石列遺構가 확인되었다. 이 결과 동서변택지개발사업예정지구에는 청동기시대의 취락이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어, 본 연구원에서는 1998년 10월부터 현재까지 1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1999년 3월부터 2000년 1월까지 2구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할 예정에 있다. 본 조사결과는 1구역에 대한 결과보고로 2구역에 대한 조사가 완료되면 보다 종합적인 고찰이 이루어질 것이다.
동서변택지개발사업지구의 주변에는 漆谷遺蹟, 八達洞遺蹟, 西邊洞古墳群, 鳳舞洞土城, 鳳舞洞․不老洞古墳群, 검단토성, 연암산유적, 침산유적 등 청동기시대 및 삼국시대의 각종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1960년에 서변동에서 靑銅斧가 발견매장문화재로 신고된 바 있다.


Ⅲ. 遺蹟의 自然環境

1. 遺蹟現況
본 유적이 위치하는 지역은 桐華川을 경계로 동변동과 서변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일대는 八公山(해발1,192m)을 배경으로 북쪽의 鷹峰(해발456m)과 동쪽의 鶴峰(해발280m), 서쪽의 函芝山(해발287m)에 의해 둘러쌓여 있으며, 도곡골에 의해 형성된 선상지를 桐華川에 의한 범람성퇴적에 의해 이루어진 충적평야지대로, 한저들, 방울들, 동변앞들로 불리워진다. 본 유적은 지명에 나타나듯 이 지역은 자연제방과 배후습지의 역할을 한 저습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유적의 동쪽으로 200m정도 떨어져서 동화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고, 근․현대에 이루어진 경지정리로 인해 유적의 주변은 최근까지 논과 밭 등의 경작지와 소규모 공장, 가축축사 등이 위치했고, 음성골에는 현재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서변동 마을유적 1구역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집석유구와 무문토기시대 전기의 주거지 10동, 수혈5기, 야외노지 2기, 야외석기제작장, 溝 등이 조사되었으며, 지금은 본 조사지역 내에 분포하는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의 배후습지를 조사하고 있다.

2. 土層 및 地質構成
1) 古地形
본 지역에 있어서 지질구조는 사암 혹은 역암으로 이루어진 기반암 위에 2~4m정도의 풍화암 혹은 풍화토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문화층은 이 상층에 형성된 퇴적층이다. 퇴적층은 전체적으로 모래점토층이며 부분적으로 자갈이 일부 포함된 모습은 하상의 유로가 형성되면서 이루어진 퇴적운동과정에 의할 가능성이 높다.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층위는 둔황갈색(Hue 10YR4/3)사질점토층으로 입자가 고운 사질점토로 점성이 강하다. 이 층은 하천의 범람에 의한 퇴적층으로 당시 하천변에 접한 자연제방으로 추정된다. 조사된 대부분의 주거지가 이 층에 위치하며, 안정된 자연제방을 이용한 주거지와 부속시설 등이 입지했다고 추정된다.
유적에 있어서 토층의 퇴적양상은 매우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하천의 운동에 의해서 주변지형이 퇴적과 침식을 반복하면서 이루어진 현상에 의한 것으로 신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그리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본 지역은 동화천의 범람과 이에 따른 河川邊 流路에 의해서 상당부분이 교란되었다.
청동기시대의 古河道는 전체적으로 북동-남서방향으로 진행하였으나, 그 후 유로의 변경과 퇴적 등으로 인해 배후습지로 형성되었으며, 河床에 형성된 土炭層(저습지)은 층서적으로 시기차를 보여주고 있다. 토탄층과 청동기시대의 문화층을 상호 연계시켜볼 때,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전기까지는 배후습지가 계속적으로 유지됐다고 판단된다. 배후습지는 물의 흐름이 변경되면서 내부퇴적물은 토탄층을 형성하였고, 유로의 변경, 홍수에
의한 범람 등에 의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형성되었다. 토탄층 내부에서는 口脣刻目土器,
口脣刻目孔列土器, 丹塗磨硏土器, 木器(石斧柄, 木柱) 등과 다량의 自然木, 植物種子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최후에 형성된 토탄층 상부에서는 無文土器와 丹塗磨硏土器, 石槍,
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복원된 서변동 마을유적의 古地形은 구릉의 말단부에 형성된 微低地와 하천변에 형성된
自然堤防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연제방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기운 모습으로 형성되었다. 초기의 지형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까지 큰 변화없이 이어져왔으며, 자연제방과 얕은 구릉말단부 사이를 일시적으로 川邊 小河川이 흐르면서 배후습지가 형성되었다. 이후 배후습지는 점차 규모가 축소되어 沼에서 육지화 되었다. 이후, 삼국시대에 이루어진 범람에 의해 생성된 여러 개의 지류가 남북으로 흐르면서 계속 침식시켰지만, 역시 배후습지에서 육지화되는 과정을 밟았다. 고려시대 이후부터 동화천의 유로가 본 유적 쪽으로 치우치면서 동쪽 대부분을 침식, 퇴적시키면서 대규모의 모래층을 생성시켰으며, 부분적으로 자연제방의 남동쪽을 침식하였다. 또한, 현대에 이루어진 대규모 경지정리와 제방축조는 동화천의 모습을 현재와 같은 지형으로 이루게 했다.
2) 土層
본 유적은 자연유로와 경지정리에 의해서 현대까지 상당부분이 교란, 재퇴적되어 왔으며, 토층조사결과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삼국시대까지의 문화층 및 舊河道가 확인되었다.
층위는 近․現代 耕作層(Ⅰ층), 三國時代 舊河道 上部堆積層(Ⅲ층), 三國時代 舊河道 堆積層(Ⅲa층), 靑銅器時代 背後濕地 上部堆積層(Ⅳ층), 靑銅器時代 背後濕地 堆積層(Ⅳa층), 靑銅器時代文化層(Ⅴ층), 新石器時代文化層(Ⅵ층), 生土層(Ⅶ층)으로 구분되어진다. 전체적인 층의 퇴적은 하천의 흐름과 일치하며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기울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퇴적이 이루어졌다. 전체적인 토양의 입자는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점토로 물의 흐름이 멈춘 시점에는 산화철과 망간침전물이 層間에 대상으로 형성되어 있다. 토탄층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삼국시대까지 형성되었으나, 두께와 내용물 구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며, 전반적으로 유기물질의 분해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土炭質 샌드(sand)層과 土炭質 실트(silt)層으로 구성된다.
자연제방은 신석기시대보다 청동기시대에 넓게 형성되어져 있는데, 이는 하천의 흐름과 배후습지대의 변화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지면서 토탄층과 퇴적층이 형성되는 것에 기인한다.


Ⅳ. 調査內容

1. 新石器時代
신석기시대의 유구로는 集石遺構가 조사되었다. 집석유구는 강변가를 따라 돌을 한 층 깔아놓은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사용된 돌들은 다양한 재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집석 내부에는 빗살무늬토기와 몸돌, 박편, 숫돌로 추정되는 돌들이 일부 섞여 있다.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타원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안에서 공간적으로 분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공간적인 분할은 집석유구의 기능적인 측면과 관계된다고 판단되며, 각각으로 구분된
집석마다 개개의 차이가 관찰되고 있다.
집석유구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빗살무늬토기로 1호 집석에서 모두 5개체분이 출토되었다. 집석의 중앙부에서 집중된 모습으로 출토된 점은 본 유구가 하나의 기능적 시설로 볼 수 있다고 판단된다.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의 기형은 포탄형으로, 기면에 시문된 문양은 無文, 短斜線文, 細線斜格子文, 太線斜格子文, 縱集線文이 구연부 하단 또는 상단부분만 시문되었다. 본 유적출토 빗살무늬토기의 특징으로는 약간 외반되는 구연부, 엉성한 시문수법, 점토화 된 태토를 들 수 있다. 특히, 시문방법에 있어서 정연성을 잃은 점은 남해안지방의 빗살무늬토기전통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며, 구연부 형태에 있어서 약간 외반되는 모습은 영남 내륙지방(陜川 鳳溪里遺蹟, 山淸 江樓里遺蹟) 출토품과 기형적으로 유사하며, 시문형태에서는 忠淸北道 中原地域인 상시 3암음유적, 錦汀里遺蹟과의 유사성이 보여진다. 따라서, 서변동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말기에 경북내륙지방 또는 멀리 충청도지역으로부터 대구지역으로 이입된 신석기문화의 일 양상을 보여준다고 추정된다.

2. 청동기시대
본 유적에서는 1구역에서 총 10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으며, 전부 화재에 의해서 폐기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 세장방형의 2가지로 나누어지며, 장방형주거지 8기, 세장방형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고, 형태 불명도 1기 있다. 이외에도 수혈 5기, 노지2기, 집석유구, 구 등이 있다.
주거지는 대부분 장방형으로 단벽 한쪽에 노지를 만들었으며, 기둥배치에 있어서 중심기둥이 부분적으로 없는 형태로 공간이용이 이루어졌다. 출토유물로 볼 때, 주거지내부는 공간적으로 분할되어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거지는 보통 2~3기가 한 단위를 이루는 모습으로 있으며, 주변부에는 수혈과 야외노지가 분포하고 있다. 수혈유구들은 현재 마을의 광장으로 추정되는 중앙부의 빈 공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는 수혈유구가 주거지들과 하나의 구성단위로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일부 주거지(5호)에 있어서 수혈을 파괴한 점에서 살펴볼 때, 마을의 공간이용 변화와 시기적인 선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야외노지는 8호 주거지 주변에서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주거지 바깥에서 취사와 같은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본 유적에 있어서 석기제작은 주거지 내부와 외부에서 이루어졌다. 석기제작장은 청동기시대의 舊河道가 지나가는 河岸쪽에서 이루어졌으며, 다량의 혼펠스박편들이 흩어진 상태로 확인되었다.

1) 住居址
(1) 1호 주거지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장축이 N-73°-E이다. 後代의 河道에 의해서 주거지의 남동쪽 모서리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길이는 537㎝, 폭 337㎝, 최대깊이 38㎝이다.
주거지내의 시설물로는 노지, 주혈, 벽체시설 등이 있다. 노지는 주거지의 동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데, 형태는 방형에 가까운 부정타원형이며, 직경 ㎝, 깊이 ㎝로 상면을 파서 만들었는데 소토화 된 벽체부가 일부 잔존한다. 주혈은 장벽쪽에 4개, 단벽쪽에 3개의 구조로 일부 주혈은 유실로 확인되지 않았으며, 주거지의 상면은 생토면을 정지한 후 벽체와
함께 점토로 부분정면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다량의 목탄이 검출되었으며, 남쪽에서는 벽체시설이 확인되었다. 목탄의 놓여진 방향을 통하여 지붕구조를 추정한다면 맞배식의 형태로 추정된다. 벽체는 먼저 수혈과 벽체사이에는 흑갈색(Hue7.5YR3/1)사질점토를 폭 10㎝정도로 충전한 후, 직경 7~10㎝정도의 나무를 세운후 옆으로 결구하고, 木造骨格 사이에 갈대와 같은 초본류로 벽체을 만들어서 완성했다.
본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중 토기는 口脣刻目土器, 口脣刻目孔列土器, 深鉢形土器, 壺 등과 다량의 석기, 숫돌, 자연석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석기에는 별모양도끼, 石鎌, 半月形石刀, 石鑿, 未完成石斧 등과 함께 臺石, 石材, 剝片 등이 검출되고 있으므로, 1호 주거지 내부에서는 석기가 직접 제작되었거나 수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된다.

(2) 2호 주거지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장축이 N-10°-W이다. 三國時代의 河道에 의해서 주거지의 북쪽단벽이 파괴되었으며, 규모는 현재 길이 370㎝, 폭 325㎝, 최대깊이 25㎝이다.
주거지내의 시설물로는 노지, 저장공, 주혈 등이 있다. 노지는 주거지의 북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데, 형태는 원형이며, 직경 33~35㎝, 깊이 4㎝로 상면을 얕게 파서 만들었는데 소토화 된 상면이 일부 잔존한다. 주혈은 장벽쪽에 3개, 단벽쪽에 3개의 구조로 일부 주혈은 유실로 확인되지 않았으며, 주거지의 상면은 생토면을 정지한 후 벽체와 함께 점토로 부분정면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다량의 목탄이 검출되었으며, 서쪽에서는 벽체시설이 확인되었다. 벽체는 직경 3~10㎝정도의 나무를 세운후 옆으로 횡치시켜 결구시킨 후, 사이에 갈대와 같은 초본류로 벽을 만들었다.
저장공은 주거지의 남쪽에서 2개가 확인되는데, 남서쪽 모서리에는 호를 정치시켰으나,
토기는 이미 제거된 상태였다. 지름 35㎝, 깊이 10㎝. 남동쪽 장벽가에 타원형의 수혈이 확인되었다. 내부에서는 소량의 목탄이 검출되었으며, 출토유물은 없다. 크기는 길이 50㎝, 폭 30㎝, 깊이 12㎝이다.
본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중 토기는 구순각목토기, 심발형토기, 淺鉢形土器 등과
다량의 석기와 박편 등이 출토되었다. 석기는 석촉, 석부, 미완성석부 등과 함께 지석, 석재, 박편 등이 검출되고 있으므로, 2호 주거지 안에서 석기의 제작 및 수리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된다.

(3) 3호 주거지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장축이 N-20°-W이다. 삼국시대의 유로에 의해서 주거지 동쪽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길이 490㎝, 폭 350㎝, 최대깊이 15㎝이다.
주거지내의 시설물로는 노지, 저장혈, 주혈 등이 있다. 노지는 북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데, 형태는 타원형으로, 직경 64x57㎝의 수혈을 파고, 직경 50x47㎝의 규모로 노를 만들었으며, 내부 상면은 붉게 소토화되었다. 주혈은 중앙에 4개, 양쪽장벽에 각각 3(4)개씩 검출되었는데 모두 12개로 추정되며, 직경 12~20㎝, 깊이 12~20㎝이다. 상면은 생토면을 정지한 후 벽체와 함께 황색점토로 정면했으며, 부분적으로 소토화 된 바닥면이 관찰된다.
저장공은 남서쪽 모서리에 직경 40x45㎝의 수혈을 파고 구순각목토기 호를 정치시켰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다량의 목탄이 검출되었는데, 이들이 놓여진 방향을 통하여 지붕구조를 추정한다면 맞배식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벽체는 직경 5~10㎝정도의 나무를 결구한 후 내부에 갈대와 같은 초본류를 묶어서 벽을 만들었다.
본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 석기 등으로, 토기는 구순각목토기, 심발형토기, 단도마연토기와 석기는 반월형석도, 마제석검, 석제방추차, 석부, 박편 등이다.

(4) 5호 주거지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장축이 N-70°-E이다. 후대의 유로에 의해서 주거지의 ⅔정도가
파괴되었으며, 길이 1,156㎝, 폭 394㎝, 최대깊이 10㎝이다. 본 주거지는 1호, 2호 수혈과 중복되었는데 주거지가 뒤에 축조되었다.
주거지내의 시설물로는 주혈이 있다. 주혈은 서쪽과 북쪽모서리에 각각 3개, 2개씩 검출되었는데, 직경 10㎝이고, 깊이 15㎝이다, 상면은 생토면을 정지한 후 점토를 한 벌 깔아서 정면했다. 출토유물은 무문토기 발, 어망추, 장방형석도, 숫돌 등이다.

(5) 8호 주거지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장축이 N-78°-E이다. 화재에 의해서 폐기된 주거지로 출입구가
서쪽에 있다. 길이 688㎝, 폭 336㎝, 최대깊이 28㎝로 출입구는 길이 148㎝, 폭 202㎝이다.
주거지내의 시설물로는 노지, 주혈이 있다. 노지는 서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데, 형태는 타원형으로, 상면에 얕게 수혈을 파고, 직경 68x54㎝의 규모로 노를 만들었으며, 내부는 붉게 소토화되었다. 주혈은 중앙과 양쪽장벽에서 검출되었다. 상면은 생토면을 정지한 후
벽체와 함께 사질점토로 정면했는데, 부분적으로 소토화 되어있다. 원래 불다짐을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상면상태가 전반적으로 약하며, 부분적인 현상임을 고려할 때 화재로 폐기되면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출토유물은 무문토기, 단도마연토기, 석도, 박편, 지석 등이 있다.


2) 수혈 및 야외노지
(1) 5호 수혈
평면형태는 타원형으로 장축이 N-67°-E이다. 삼국시대의 舊河道에 의해서 남쪽이 일부 삭평되었다. 내부에서는 목탄과 소토가 많이 검출되었으며, 무문토기, 단도마연토기와 박편이 출토되었다. 야외노지일 가능성이 있다. 길이 305㎝, 폭 248㎝, 깊이 28㎝.
(2) 6호 수혈
평면형태는 원형으로 장축이 N-20°-W이다. 삼국시대의 舊河道에 의해서 남동쪽의 일부가 삭평되었다. 내부에서는 목탄과 소토, 돌 등이 검출되었으며, 구순각목토기와 지석, 박편 등이 출토되었다. 길이 188㎝, 폭 127㎝, 깊이 10㎝.
(3) 7호 수혈
평면형태는 원형으로 장축이 N-10°-E이다. 삼국시대의 舊河道에 의해서 상부가 일부 삭평되었다. 수혈내부에 별다른 시설은 없으며, 무문토기와 지석, 박편 등이 출토되었다. 길이 148㎝, 폭 130㎝, 깊이 20㎝.

3) 溝狀遺構
溝狀遺構는 본 유적의 북서쪽 구릉 말단부 微低地에 위치하고 있다. 舊河道에 의해서 마을과 구분되어있는 점은 당시 생활공간에 있어서, 주거지역과의 공간구분이란 측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구상유구는 등간격을 이루면서 북서-남동방향으로 형성되어있다. 구 내부에서 모래층이 확인되고 있는 점은 水路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부에서는
무문토기, 석기, 박편 등이 출토되고 있다. 부분적으로 주혈이 확인되는 점에서 溝狀遺構는 전체적인 구획경계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Ⅴ. 出土遺物

1.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의 유물은 빗살무늬토기, 숫돌, 석기박편으로 모두 집석유구에서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모두 6개체분이 확인되었으며, 기형은 첨저의 포탄형이며, 태토는 석립이 많이 섞인 점토질이다. 구연부에 단사선문 또는 사격자문, 종집선문을 시문한 것과 무문의 것이 있다. 석기는 혼펠스제 박편과 砂岩製의 숫돌이다.

2.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無文土器, 石器, 木器가 출토되었다. 無文土器는 구순각목토기, 구순각목공열토기, 심발형토기, 천발형토기, 단도마연토기, 호 등이다. 구순각목은 구연선단에 사선으로 빗겨눌렀으며, 공열문은 토기 내면에서 밖으로 반투공시켰다. 단도마연토기는 구형의 동체에 다소 곡선적 기미로 외반하는 구경부와 抹角平底의 저부를 갖고 있다.
구순각목토기중 대형의 심발형토기는 구연부 직하에 3조의 補修孔을 갖추었다.
石器는 별모양도끼, 석부, 유구석부, 석착, 석겸, 반월형석도, 석촉, 석창, 방추차, 연석,
숫돌, 박편 등이 있다. 석기제작에 있어서 반월형석도, 방추차, 숫돌은 砂岩, 석겸, 석부, 유구석부, 석촉, 석창 등은 혼펠스, 대석은 砂岩과 礫岩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야외석기제작장에서는 약 1㎏ 정도의 혼펠스 박편이 마제석촉과 함께 출토되었다.
木器는 모두 배후습지에서 출토되었으며, 다량의 자연목과 함께 출토되었다. 목기는 石斧柄과 圓板形有孔木器, 木柱 등으로 모두 당시 생활과 관계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Ⅵ. 調査成果 및 意義

1. 대구 서변동유적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공존하는 생활유적으로 동일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조영되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선사문화의 계통과 계승관계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 대구지역에서 처음으로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빗살무늬토기가 다수 확인됨으로서, 대구를 비롯한 금호강유역의 신석기문화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본 유적의 신석기시대 자료는 金泉 松竹里, 淸道 梧津里遺蹟과 연계하여 보면, 신석기시대의 문화교류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3.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친 자연환경을 살필 수 있는 土炭層과 당시의 背後濕地, 舊河道와 더불어 주변의 주거유구, 수혈, 집석유구 등 당시의 생활유적을 함께 조사함으로써 선사시대의 종합적인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또, 이번에 조사된 마을유적은 平地型의 마을유적으로서 구릉에 위치하는 마을유적과 상호 비교할 수 있는 점도 하나의 성과라고 하겠다.

4. 청동기시대 전기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무문토기(口脣刻目土器, 口脣刻目孔列土器, 深鉢形土器, 壺形土器, 丹塗磨硏土器)와 석기(별모양도끼, 半月形石刀, 石鎌, 石斧, 石鑿, 숫돌) 등 약 100여점의 유물은 대구지역의 청동기문화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완형의 별모양도끼를 비롯한 다양한 석기들은 귀중한 자료로서 당시 석기문화의 발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적 전경
배후 습지
배후 습지 출토 도끼자루
집석유구 전경
1호 집석유구 토기출토 상태
1호 주거지
1호 주거지 출토유물
2호 주거지
2호 주거지 출토유물
3호 주거지
8호 주거지
6호 수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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